[단독/窓]보험사기범 덫에 걸려 임신-출산… 가출소녀의 비극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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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절 찾은 건가요?”

전화기 너머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찰이 전화를 걸어 “보험사기범 노○○ 씨(29)를 아느냐”고 물은 참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 교통범죄수사팀은 9월 5일 자신의 스포츠카(마세라티)가 사고를 당한 것처럼 꾸며 보험금 4370만 원을 타내려 한 노 씨의 여죄를 캐던 중 2011년 3월 노 씨의 차량에 치여 보험금을 탄 A 씨(21·여)를 찾아냈다. 전화를 받은 A 씨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노 씨의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으며, 노 씨가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숨어 지낸다는 얘기였다.

A 씨가 노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세 때인 2011년 2월 서울 영등포구의 한 청소년 쉼터 앞에서였다. A 씨는 고교를 자퇴한 뒤 수년간 가출을 반복하다 한 수녀의 도움으로 쉼터에 입소해 디자인 수업을 들으며 자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노 씨는 ‘장애인인권복지협회’ 소속 활동가라는 가짜 명함을 내밀며 접근해 고민 상담자 역할을 자처했다.

수사 결과 노 씨는 처음부터 사기에 이용할 가출 소녀를 노리고 A 씨에게 접근했다. 당시 이를 전혀 몰랐던 A 씨는 “차에 치인 것처럼 꾸미고 잠시만 병원에 누워 있으면 돈이 나온다”는 노 씨의 꼬임에 넘어가 2011년 3월 범행에 가담했다. 노 씨는 보험금 294만 원 중 35만 원만 A 씨에게 쥐여준 뒤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다.

노 씨와의 잦은 외박 탓에 쉼터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A 씨는 노 씨의 집으로 들어갔다. 석 달도 지나지 않아 태기(胎氣)가 왔다. 노 씨는 낙태를 요구했지만 A 씨는 산부인과에서 배 속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들은 뒤 마음을 바꿨다. 아기를 낳자고 애원했다. 노 씨가 술을 마시고 욕설을 퍼붓는 날이 잦아졌다. A 씨가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는 만삭의 몸이 되자 폭행이 시작됐다. 지난해 2월 딸을 출산한 뒤부터는 수차례 A 씨의 목을 조르며 “죽어라”라고 했다. 견딜 수 없었던 A 씨는 태어난 지 한 달 된 딸을 안고 미혼모 보호시설로 달아났다.

A 씨는 노 씨가 혹시 찾아올까 봐 가족에게는 돌아가지 못한 채 지인 집에서 지내고 있다. A 씨는 3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한때 범죄에 가담한) 내가 죗값을 치르는 것이 한 살배기 딸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정에서 노 씨를 다시 보게 될까 봐 너무나 두렵다”고 말했다. 경찰은 노 씨에게 3건의 보험사기뿐 아니라 상습가정폭력 혐의도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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