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목동 목원대 옛 캠퍼스에 있던 신학관 전경. 1956년 지어진 이 건축물은 근대건축사에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1999년 서구 도안동 현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철거됐다.
대전 서구 도안동 목원대 캠퍼스의 신학대 주변에 ‘신학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신학관은 이 대학의 옛 목동캠퍼스 시절의 신학대 건물. 기독교 대학인 목원대의 상징물이자 근대건축학상 중요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신학관의 복원이 학교 이전을 위한 신학관 철거 공사 때 현장을 찾아 벽돌을 하나 둘 주워 보관해 온 한 건축학 교수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신학관 철거 현장을 지킨 노(老) 교수
김정동 교수가 신학관 신축 현장에서 신학관 건축에 쓰일 옛 목동캠퍼스 신학관의 벽돌을 만져 보고 있다. 그는 신학관을 해체할 당시 이 벽돌을 손수 모아 보관해 왔다. 목원대 제공1999년 4월 대전 중구 목동 목원대 옛 캠퍼스. 캠퍼스 이전 작업으로 아무도 목동캠퍼스에 눈을 돌리지 않던 당시 근대건축사의 대가인 이 대학 건축학부 김정동 교수(65)는 신학관 철거 현장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을 찾은 그는 넝마주이처럼 신학관을 이루고 있던 벽돌을 하나 둘 주워 자신의 차량에 실은 뒤 도안동 새 캠퍼스로 날랐다. 이렇게 모은 벽돌은 무려 4만 장에 이른다. 그는 벽돌이 눈비를 맞아 상할 것을 우려해 땅을 파고 묻어 놓았다. 철거 회사는 김 교수가 찾아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아파트를 짓기 위해 건물을 불도저로 빨리 밀어 버려야 할 텐데 자꾸만 건축 재료가 훼손되지 않도록 잘 분해해 달라고 부탁해 오기 때문이었다. 김 교수는 이렇게 해체한 창틀과 문짝, 물받이, 현판 등을 수거해 자신의 연구실에 차곡차곡 쌓아 보관했다. 그의 연구실은 책을 찾기도 어려울 만큼 창고로 변해 갔다. 귀중한 근대건축물을 그대로 버려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언젠가는 신학관을 복원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신학관은 1956년에 세워졌는데 경제사회적으로 어려웠던 195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이렇다 할 건축물이 거의 지어지지 않아 근대건축사의 명맥을 잇고 있어요. 수많은 신학자를 배출한 기독교 학원인 목원대의 정체성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그는 신학관의 중요성과 복원의 필요성을 담은 ‘목원대 목동캠퍼스 신학관 복원 설계 보고서’를 2000년 2월 학교에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2010년에야 빛을 보게 됐다.
○ 10년 만에 빛 본 신학관 복원 보고서
도안동 캠퍼스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건물들도 들어찼고 나무도 울창해져 안정감을 찾아 갔다. 하지만 오랜 역사(1954년 대전신학교로 출발)에도 불구하고 신설 학교 같은 분위기는 여전했다. 전통과 정체성을 느끼게 하는 건축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캠퍼스의 문제점을 읽어 낸 김원배 총장이 2010년 10월 “신학관 복원이 학교의 정통성 회복에 필요하다”며 복원추진위를 발족했다. 그해부터 대학 구성원과 동문 기업인 및 동문 목회자, 지역민들이 신학관 복원 모금 운동에 동참해 최근까지 18억2000여만 원의 기부금을 모았다. 이 기금으로 연면적 1581m²(약 470평), 지상 2층, 지하 2층의 신학관이 올해 8월 말 완공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김 교수가 보관해 온 벽돌 등 건축 재료가 복원에 고스란히 쓰이고 있다.
정년을 앞둔 김 교수는 19일 그동안 자신이 열정을 쏟아 온 ‘신학관’ 복원에 써 달라며 1000만 원을 학교에 냈다. 지난해 11월 학술 및 연구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이다. 소회를 물으려 하자 김 교수는 “나의 공로를 다룰 기사라면 인터뷰 안 하겠다”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신학관 복원의 의미를 묻자 말을 이었다. “대학은 현대적 건물과 고전적 건물이 혼재돼 있어야 전통과 정체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신학관 복원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바라던 일이죠. 재정적으로 어렵더라도 학교에서 좀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캠퍼스의 명물로 만들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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