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민에 식사 대접하고… 성탄절 케이크 선물하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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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원룸 주인 보셨나요?

‘착한 집주인’ 권기영 씨가 23일 입주자들에게 보낸 단체 문자. 권오남 씨 제공
‘착한 집주인’ 권기영 씨가 23일 입주자들에게 보낸 단체 문자. 권오남 씨 제공
‘즐거운 성탄을 기원하며 조그마한 선물을 문 앞에 두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23일 밤 서울 관악구 중앙동의 한 원룸 건물 입주민들의 휴대전화에 이런 문자메시지가 일제히 도착했다. 현관문을 연 입주자들의 눈에는 문 앞 마다 놓인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샴페인, 그리고 자신처럼 놀란 표정의 이웃이 보였다. 선물을 보낸 이는 원룸 주인 권기영 씨(47).

권 씨가 쓴 이벤트 비용은 케이크와 샴페인 20개씩 모두 40만 원. 원룸에 사는 한 입주민이 권 씨의 성탄절 이벤트와 그간의 배려를 2030세대가 많이 찾는 한 웹사이트에 올리자 ‘훈훈한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우아 믿을 수 없다. 이런 분이 있다니. 아직 세상은 살 만하고 아름답다’ ‘실제 일어난 일일까 싶을 정도로 멋지네요’ ‘이런 분께 고시원 위탁경영을 맡겨야’ ‘감동을 넘어 감격… 다른 곳으로 퍼가도 될까요’….

권 씨의 사연이 인터넷과 인근 서울대에 알려지자 방을 구하고 싶다는 문의가 줄을 이었다. 격려 문자도 왔다. 권 씨의 작은 배려에 2030세대가 이처럼 커다란 울림으로 반응하는 것은 젊은층이 주거 문제로 받는 고통이 그만큼 큼을 보여준다.

‘내 원룸은 비 새는 상태로 2주를 고생해야 고쳐준다’ ‘계약할 때 도시가스라더니 막상 LPG로 보일러를 때는 탓에 난방비로 죽을 지경’ 등 2030세대의 하소연 댓글도 줄을 이었다.

직장인 장남수 씨(27)는 “한겨울에 언 수도관 탓에 방 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전기장판에 불꽃이 튀는데도 주인은 수리를 해주지 않았다”며 “도저히 살 수 없어 계약기간 내에 방을 빼자 복비까지 받아 챙겼다”고 토로했다. 청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단체인 민달팽이유니온 이한솔 대표는 “권 씨와 같은 ‘착한 집주인’을 만나는 건 복권 당첨 같은 행운”이라며 “개학 철마다 자취생들은 방 구하기 전쟁을 벌이는데 이런 상황이 해결돼야 나쁜 집주인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이런 반응에 권 씨는 “대학 시절 하숙집 주인아저씨는 항상 하숙생이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해 외식도 자주 시켜줬다”며 “그 배려를 다시 젊은 세대에게 돌려준 것인데 칭찬을 받으니 쑥스럽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 프로그램 개발 업무를 하는 권 씨는 지난해 건물을 인수하고 임대업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임대업을 시작할 때 입주자가 들어오면 꼭 식사부터 대접하겠다고 다짐했다”며 “사는 곳과 원룸이 멀지만 일부러 퇴근길이나 토요일 점심 때 찾아가 젊은이들 입맛에 맞는 곳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고 말했다. 권 씨는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자 각 층 복도에 폐쇄회로(CC)TV와 밝은 조명을 달고 각 방에는 전문 경비업체의 경보장치를 설치해줬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고장이 나면 즉시 고쳐준다.

입주자 권오남 씨(27)는 “전 주인은 얼굴도 몰랐고 관리도 엉망이었다”며 “예전엔 집에 돌아오면 혼자여서 허전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 평일 저녁에 아저씨와 다른 방 사람과 함께 식사하니 정말 더불어 사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집주인#권기영#관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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