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별지와 같이 주장하나 갑 1부터 8호증의 각 기재, 증인 서OO의 증언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010년 11월 서기호 서울북부지법 판사(41·사법시험 39회)는 자신이 맡은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이런 판결문을 내놓았다. 이른바 ‘72자 판결문’이다. 이 판결문은 양측의 주장도, 판단 근거도 없어 법원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이달 17일로 재임기간이 만 10년이 되는 서 판사는 10일 대법원이 발표한 재임용 판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낮은 근무평정이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재임 기간이 20년 되는 법관 40명과 10년 되는 법관 73명 등 모두 113명이 법관으로 재임용됐다. 서 판사 외에 재임 기간이 10년 된 판사 1명도 낮은 근무평정이 문제가 돼 재임용에서 탈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의 명단 발표 후 서 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인 ‘코트넷’에 올린 글에서 “철저한 비공개 원칙으로 10년간 근무평정이 어떻게 매겨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다가 갑작스럽게 단 2주 동안 형식적 심사절차를 거쳐 단 두 줄의 재임용 거부 통보를 받았다”며 심사 과정에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또 “추후 헌법소원 등 법적 대응 방침을 포함한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오전에 출근해 재판을 진행했던 서 판사는 오후에 재판 일정을 모두 연기했다.
서 판사는 최근 대법원 법관인사위원회에서 재임용 적격 여부에 대해 소명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가 스스로 공개한 근무성적은 10년간 하 5회, 중 2회, C 2회, B 1회였다. 10년차 법관 중 공동 하위 2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관인사위원회는 서 판사의 소명을 들은 뒤에도 ‘연임 부적격’ 의견을 대법관회의에 올렸다. 대법관들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판사 재임용 적격 심사에는 매년 5∼10명이 대상에 오르며 대부분 사표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결정에 대해 법조계 일각에서 비판 여론이 감지되고 있다. 서울고법 이옥형 판사는 이날 ‘코트넷’에 “이 시대에 가장 판사다운 판사 한 명을 잃었다. 이보다 더 아픈 것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판사의 정신과 기개를 잃었다는 것이고 법원은 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회장 김선수)은 “(서 판사가) SNS를 통해 활발히 소통하며 비판적 견해를 표출한 데 대한 보복이 아니냐는 항간의 우려는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라며 “법관 재임용 제도가 대법원의 정책과 방침에 순응하지 않는 법관을 솎아내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움직임을 의식한 듯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은 결과 발표 직후 ‘코트넷’에 “법관의 신분보장이 법관에 대한 평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평가를 받지 않고선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며 “법관의 신분보장과 독립을 더욱 공고히 하도록 합리적으로 제도를 정비해 나갈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한편 이번 심사에서 우리법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한 문형배 부산고법 부장판사와 2009년 노회찬 당시 진보신당 대표의 후원회에 참석해 논란을 일으켰던 마은혁 서울가정법원 판사는 재임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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