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4>좌담-성찰과 자긍, 두 날개 현대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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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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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연구의 문제점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좌담회에서 참석학자들은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관에 기반을 둔 현대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 공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한국 현대사 연구의 문제점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된 좌담회에서 참석학자들은 “민주화와 산업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을 설명하고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사관에 기반을 둔 현대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 공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한국 현대사는 지금까지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복을 전후해 좌우 이념 대립이 격화되는 격동의 시기에 ‘현대사’를 연구의 주제로 등장시키기도 힘들었다. 이후 들어선 독재 정권에서도 현대사 연구는 금기어와 같았다. 역사학계에서는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역사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사를 용감하게 먼저 공부한 측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발전을 사시로 보는 좌파 학자들과 이른바 ‘운동권’ 젊은이들이었고, 그 인식과 연구결과가 사회에 확산됐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한 국가가 됐다. 이런 발전의 동력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근대와 현대가 시작되는 시기의 역사를 저항과 투쟁으로만 기록하는 것이 이를 잘 설명하는 방식일까. 대한민국 발전의 싹이 근현대사가 시작되던 시기의 교육과 산업에는 없었을까. 미래 한국의 비전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이나 민중의 관점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으로 한국사를 다시 봐야 한다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인식에서 시작한 본보의 ‘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 시리즈를 좌담회를 끝으로 마무리한다. 새로운 현대사 모색을 위한 이번 좌담회에는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한국현대사학회 회장), 허동현 경희대 교수, 공주대 이명희 교수가 참여했다. 》
1980년 창간호를 낸 뒤 바로 폐간된 ‘계간 현대사’. 창간을 주도했던 최정호 울산대 교수가 보관하던 잡지와 허동현 교수가 헌책방에서 구해 간직하던 잡지가 한자리에 모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80년 창간호를 낸 뒤 바로 폐간된 ‘계간 현대사’. 창간을 주도했던 최정호 울산대 교수가 보관하던 잡지와 허동현 교수가 헌책방에서 구해 간직하던 잡지가 한자리에 모였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허동현=우선 1980년대 ‘계간 현대사’ 창간을 주도하는 등 현대사 연구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셨던 최정호 교수께서 당시 상황과 현대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최정호=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군사정권 때 하지 못했던 일을 하자며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울언론클럽을 만들고 언론인과 학자들이 참여하는 현대사 잡지를 내자고 해서 준비한 것이 ‘계간 현대사’였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사는 역사학자만 참여하는 분야가 아니다. 국제정치학 군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현대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일본에 갔더니 현대사 자료라는 것이 전부 총련 자료이고 우리 입장의 자료는 20∼30%도 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북한이나 전후사 문제는 당시로서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분야였는데 우리 학계가 너무 소홀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현대사 잡지로 시작하려 했다. 학자들과 논의해 현대사의 기점을 6·25전쟁으로 삼고 창간호를 냈다. 그러나 1980년 11월 창간기념식을 하던 날 신군부의 정기간행물 폐간 목록에 포함돼 결국 좌절됐다. 이후 진공 상태이던 현대사 연구는 1980년대 이른바 ‘운동권’의 연구가 지배하게 됐다.

▽허=신군부 등 역대 정권들의 억압으로 현대사 연구사 기피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기회를 놓친 것 같다. 북한만 해도 국민국가의 역사가 더 많은데 우리는 국민국가의 역사를 망각했던 같다.

▽최=공동체의 정체성은 과거 기억의 공유에 있다. 세계화 시대, 국제화 시대일수록 기억의 공유 즉, 현대사가 중요하다.

▽허=최근 한국현대사학회가 권희영 교수를 학회장으로 추대하고 이런 식의 역사 방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며 출사표를 올렸다.

▽권희영=내가 공부를 하던 1970년대 중반 대학에는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선생님이 한 명도 없었다. 현대사에 접근하려면 방법적 기초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명백한 인식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근현대사를 공부하겠다고 하면 고대나 중세사를 먼저 하고 나중에 하라는 것이 당시 학계의 분위기였다. 이런 태도는 기본적으로 역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과거를 보든 미래를 보든 현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현대를 해석할 능력이 없으면 과거를 해석할 수도 없다.

▽허=미 수정주의 사관의 영향으로 6·25전쟁이 미국과 남한이 일으킨 전쟁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확산됐고, 교과서는 우리 역사를 민족 단위로만 서술하고 있다. 미래 세대 교육을 위해서는 현대사의 올바른 연구가 더욱 중요하다.

▽이명희=역사교육계에서 현대사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에야 논의되는 등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선진국의 경우 현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현대사 교육도 중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우리의 현대사 연구는 특히 주류 세력에 대한 연구가 기피되거나 경원시됐다고 생각한다.

▽최=유신체제나 광주대학살과 같은 일이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에 현대사 연구가 단절된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의 비극이다. 정권이 현대사 연구를 탄압했기 때문에 좌파 쪽에서 연구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정권의 정당성이 무너지면서 좌파 쪽에서 현대사 연구의 금기를 깨고 연구를 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기조의 연구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금부터 할 일이 많다.

▽이=현대사 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은 2002년이다. 한극 근현대사 교과서가 새로 생기면서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서술과 평가에 차이가 있다는 권철현 의원의 지적에서 시작돼 현대사 전체 기술의 편향성 문제로 번졌다.

▽권=앞으로가 중요하다. 사실에 충실한 설득력 있는 논리로 현대사를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교과서에 독립운동처럼 투쟁과 저항의 역사만 기술해서는 오늘날의 한국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민족주의가 여전히 필요하지만 이 같은 관점에서만 통일을 바라보면 안 된다. 민족과 민중의 관점을 넘어 이제는 국가와 국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국가로서의 비전을 미래 세대에도 교육할 수 있다. 지금은 교과서에 통일을 지향한다는 관점 외에는 별다른 국가적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이=통일 지향을 서술한 것에도 문제가 많다. 많은 교과서들이 ‘평화 통일’은 강조하지만 우리 헌법에 나와 있는 ‘자유·민주적 질서에 의한 평화통일’이라는 통일국가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 현대사 연구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진행돼야 할 것이다.

▽최=앞으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할 때는 남로당을 연구해야 한다. 남한에서 온건좌파와 극좌파가 남로당으로 합쳐지면서 오늘날 대한민국 좌파 진영에 세밀한 구분이 없어졌다. 독일 사민당은 공산당이 합치자는 제안을 했을 때 단호히 거부해 지금도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좌파의 핵심 정당 역할을 하고 있다. 남로당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은 그 이후에 한국에서는 공산당과 싸우는 좌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유럽의 진보 세력은 스탈린주의와 싸워 본 진보다. 오늘날 한국의 문제점을 짚고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현대사 분야에서 연구해야 할 주제들은 이처럼 너무나 많다.

▽권=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패러다임이 변했고, 체제 경쟁은 끝났다. 그렇지만 이런 전반적인 조류 속에서 현대사를 바라보는 연구가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 세계사적 맥락 속에서 현대사를 연구하고, 개인의 인권 등 인류 보편적 정서에 입각한 연구가 많아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사 연구는 시각이 협소했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역사의 이해는 인간의 이해이며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역사학이 조명하고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현대사학회에 정치 경제 외교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역사교육과 관련해서도 편협하게 전개해서는 곤란하다. 민중과 민족을 중시하고 평등을 강조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이나 성별, 종교 등 다양한 가치를 살린 관점이 살아나야 한다. 남북문제를 교육할 때도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통일을 절대적이고 침범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로만 그려야 하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민과 국가에 가치를 두는 관점이 도입된다면 통일 문제를 다각도로 연구할 여지가 생긴다.

▽권=전반적으로 기존 역사에는 자긍심이 결여돼 있다고 생각한다. 성찰과 반성을 강조하면서 자기 국가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만든다면 정체성은 성립될 수가 없다. 앞으로 현대사 연구와 교육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보완돼야 할 것이다.

▽최=앞으로 현대사 연구를 하면서 결론을 재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철저하게 사실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한다. 개방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광복 후의 업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연구할 때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역사적으로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어두운 면을 감추거나 덮으면 현대사 연구가 정통성을 갖기 힘들 것이다.

▽허=지금까지 현대사는 성찰에만 무게 중심을 둔 것 같다. 역대 정권들이 만들어낸 억압적인 정치 사회 체제에 일차적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성찰뿐만 아니라 자긍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긍과 성찰’의 두 날개로 현대사를 그릴 수 있어야 대한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정리=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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