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강국이 앓고 있다]<9>포퓰리즘에 무너진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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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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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하면 보조금 쿠폰으로 무마… “떼쓰면 더 준다” 너도나도 거리로

“오르는 물가를 감당할 수 없다. 생활비를 더 달라.”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오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한복판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수백 명이 모여 대통령궁에서 연방 의회 의사당으로 이어지는 6차로 도로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10대 청소년, 젊은 부녀자, 60대 노인들로 구성된 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소도시에서 모여들어 ‘생활 보조금을 올려달라’고 적힌 현수막을 흔들었다. 시위에 참여하고 있던 다니엘 아라곤 씨(42)는 “2년 전에 실직한 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 1200페소(약 33만6000원)로 네 자녀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시위를 하지 않으면 보조금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요즘도 ‘복지혜택을 늘려달라’는 시위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로자, 공립학교 교사, 저소득층, 노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임금 인상, 생계지원금 증액, 연금 지급액 증액 등을 요구한다. 피켓을 들고 도로를 점거한 시위대를 일컫는 ‘피케테로(piquetero)’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복지 전문가들은 “현금을 뿌리는 무분별한 복지 지출로 정권을 유지해온 정치인과 정부 지원금만 바라는 사람들이 나라를 거덜 내고 있다”며 혀를 찼다.

○ 사라지지 않는 포퓰리즘의 그림자

아르헨티나는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또 전국 7500개 국립 의료시설에서는 보험증이 없어도 누구나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 같은 복지제도의 뿌리는 1940, 50년대와 1970년대에 집권한 후안 페론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론은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복지 지출을 늘려 ‘포퓰리즘 정책의 원조’라는 별칭을 얻었다.

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그녀의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도 페론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8년 공공연금에 대한 국고 지원이 6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도 연금 수령액을 50% 인상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26% 올렸다. 경기침체에 따른 내수 진작이 연금을 인상한 이유였지만 “2008년 총선 이후 집권당의 지지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연금 이외에 각종 수당과 보조금도 집권당의 작품이다. 현재 실업자 가정에는 실업수당 이외에도 자녀 수에 따라 최대 1100페소(약 30만8000원)의 자녀 양육수당이 지급되고 저소득 가정에는 매월 200∼380페소(약 6만1000∼10만6000원)의 보조금이 나간다. 무주택 가정에는 여기에 더해 매월 700페소(약 19만6000원)의 집세 보조금이 지급된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집세 보조금을 올해부터 1200페소(약 33만6000원)로 올려주기로 했다.

시위를 무마하기 위한 현금 뿌리기 관행도 여전하다. 지난해 12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인도아메리카노 공원에서 빈민 1만1000여 명이 생활비 지원을 요구하며 일주일 동안 점거 농성을 벌이다가 이웃 아파트 주민들과 충돌했다. 정부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을 점거한 사람들에게 현금과 바꿀 수 있는 쿠폰을 나눠줬다.

○ 무분별한 복지에 무너진 경제

아르헨티나는 비옥한 땅과 1등급 농산품, 풍부한 천연자원 등으로 20세기 초만 해도 세계 10대 선진국 가운데 하나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프랑스 독일 등과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슬럼가의 빈민과 실업자들이 넘쳐난다.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생활비가 치솟아 중산층도 생활고를 호소한다.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62위다. 그나마 최근 3년간 국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민소득을 약간 올려줘 더 밀리지는 않았다.

분배 우선의 경제 정책과 나눠주기 식 복지 지출은 아르헨티나가 선진국에서 밀려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복지 지출로 재정적자와 외채가 늘자 아르헨티나는 정부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외국에서 빚을 끌어다 썼다. 4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물과 쇠고기를 수출했지만 정부 예산은 포퓰리즘 복지 정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 58억 달러였던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2004년에는 28배인 1623억 달러로 늘었다. 이에 앞서 2001년에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하겠다며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을 선언했다.

최근에는 국제 농산물 가격 상승 덕분에 매년 9% 안팎의 성장률을 보였지만 방만한 재정지출과 고질적인 초(超)인플레이션으로 경제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 국민들 “더 달라” 아우성

대통령궁 앞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인근에서 수백 명의 시민이 도로를 점거한 채 정부에 생활보조금 증액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대통령궁 앞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인근에서 수백 명의 시민이 도로를 점거한 채 정부에 생활보조금 증액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오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연방정부 노동부 청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호세 누에보 씨(40)는 “우리도 정식 직원으로 채용해달라”는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정식 직원들의 월급은 4500페소(약 126만 원)인데 우리는 한 달에 2300페소(약 64만 원)밖에 받지 못한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비슷한 시간 보건부 청사 앞에서는 병원의 간호사와 행정직원 100여 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나의 혜택이 나오면 둘을 더 달라’고 하는 시위 문화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아르헨티나 국민들 가운데서는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마리아 에우헤니아 비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복지부 장관은 “시민들에게서 ‘이제는 선심성 복지 지출을 축소하고 경제발전 청사진을 제시해달라’는 얘기가 더 많이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 “연금 줄게 표 다오” 票퓰리즘이 복지망국의 시작 ▼

아르헨티나 사회보장 제도는 선거 때마다 복지 혜택을 늘리겠다는 공약으로 유권자의 표를 끌어 모은 정치인들에 의해 자생력을 잃어갔다.

첫 틀은 1946년 6월 아르헨티나 노동당을 등에 업고 집권한 후안 페론 전 대통령(사진)이 만들었다. 포퓰리즘의 대부 격인 페론 대통령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집권하면서 저비용 고지출 구조의 공공연금을 도입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소득의 8%를 연금 보험료로 내고 은퇴 후 소득의 82%를 연금으로 받아갔다. 연금 지급 연령은 47세. 선진국도 흉내 내기 힘든 제도였다.

페론은 나아가 1952년 대선 당시 연금 혜택 확대 공약으로 지지표를 모았다. 그가 “내게 표를 몰아주면 연금을 더 많이 늘려주겠다”는 기치를 내걸자 득표율은 대선 사상 최고치인 63%로 올랐다. 그해 페론의 재집권 기반은 그의 공약을 믿었던 근로자였다.

하지만 이 연금제도는 곧 국가재정을 흔들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집권한 군부정권이 경제 붕괴를 우려해 해마다 연금을 깎고 복지 지출을 줄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연금과 의료보험은 1994년부터 국가의 곳간을 다 비울 정도로 경제를 압박했다.

1994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적연금 제도에 손을 대 부분 민영화를 도모했다. 그는 기초연금을 소득의 28%로 낮추는 대신 가입자가 개인계좌를 열게 해 연금을 모아두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 개혁은 어설펐다. 오히려 연금이 개인계좌에 묶여 세수가 고갈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2001년 6월 국가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55%에 이르자 페르난도 데라루아 대통령은 연금 수령액을 평균 13% 삭감했다. 정부가 GDP의 3%를 연금에 지원했지만 적자를 메우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2년 1월 에두아르도 두알데 대통령은 재정적자 누적에다 실업률이 20% 이상 치솟자 대외부채 상환 불이행을 선언했다. 그러자 연금제도가 제 기능을 잃었다. 시민들은 연금 계좌에서 돈을 빼가며 가입을 거부했다. 당시 연금 가입자는 매년 26%씩 줄었다. 국가도 연금기금을 마지막 보루로 여기고 연금운영회사에 국채 인수를 떠맡기는 등 기금 탕진에 앞장섰다.

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전임자이자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임기 2003∼2007년)도 정치적 성장 배경에서는 페론의 분파로 분류된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8년 11월 기간산업 국유화와 함께 민간 연금회사를 국영으로 바꾸고 연금기금도 국고로 환수했다. 모델은 좌파 독재가 득세한 베네수엘라였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당시 의회선거에서 참패할 기미가 보이자 연금 수급액을 50% 올려 유권자의 환심을 샀다. 국유화로 끌어들인 연금 기금은 실업자 일자리 돕기나 국채 발행에 이용되기도 했다. 사회안전망 역할을 해야 하는 연금 기금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대외채무 383억 달러 상환에 이용되는 등 아슬아슬한 곡예를 계속하고 있다.

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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