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공부]비교과 활동, 못말리는 ‘탈선’…이젠 ‘스펙용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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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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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자=개인 고교생… 인증서 직인=학생 도장…

《올해 8월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고등학생이 주관한 ‘모의 ○○대회’가 열렸다. 나흘간 진행된 대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고교생 180명이 참가했다. 대회에 참가했던 K 군(18)은 마지막 날 참가 인증서를 받고 황당했다. 공신력 있는 기관의 직인이 아니라 대회를 만든 고교생 대표의 도장과 고교생이 운영하는 청소년단체의 도장이 찍혀있었기 때문. K 군은 “사실 공신력 있는 대회인지 아닌지 잘 모르고 참가했다”면서 “입학사정관제로 대학에 합격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단 참가해보는 나 같은 학생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 대회를 직접 기획·운영한 고3 C 군(18)은 “학생이 발급한 인증서지만 제출하면 학교생활기록부에 특별활동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면서 “학생부에 기록할 때 담임선생님도 어디서 주최하고 주관한 대회인지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주장했다.》

입학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서 변질된 ‘스펙용 대회’가 난립하고 있다. 입학사정관제에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요량으로 크고 작은 대회가 크게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학생이 직접 주최하는 대회도 생겼다. 대회를 주최하는 입장에선 ‘다양한 대회 참가가 입학사정관전형에 도움이 된다’ ‘자기소개서에 진로와 관련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어필할 수 있다’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수상한 실적은 매우 중요하다’며 홍보에 나서지만 실제로 대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다.

변질된 스펙용 대회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고교생이 주최하고 운영하는 대회에 문제는 없을까. 이들 대회의 실태를 알아보고 대학 입학사정관은 이런 대회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본다.

○ 스펙용 대회, 아버지가 후원하고 학생이 심사하고…

스펙용 대회를 학생이 직접 주최하는 사례는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던 지난해부터 크게 늘었다. 취재 결과 확인된 전국단위 대회만 10개가 넘는다. 모두 올해 열린 것으로 대회당 100명 이상이 참가했다.

요즘 학생들이 직접 대회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겨울방학 때 진행할 대회를 기획하고 있다는 한 고교생은 “대회를 주도적으로 만들면 대학 가는 데 기획력, 리더십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스펙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대회는 주최 학생의 부모가 나서는 경우가 많다. 학생 스스로의 힘으로 장관상을 수여하도록 하거나 협회나 기업의 후원을 받는 것은 실제로 쉽지 않다. 비교과활동에 관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이모 씨는 “한 모의 ○○대회는 처음부터 모 협회의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네트워크로 공공기관의 후원을 받아 대회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자신의 딸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학생이 주최하는 대회는 운영상 문제점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후원단체를 내세워 ‘공신력 있는 대회’라고 포장하지만 교육, 심사, 수상자 결정까지 모두 학생이 맡는 경우가 많다. 주요 국가기관장의 명의로 된 상을 준다고 홍보하며 참가자를 모집했던 한 대회는 대회 도중 기관장상 수여 계획이 취소되기도 했다. 애초에 홍보한 내용과 달랐던 대회에 실망한 학생도 많다.

올해 열린 한 모의 법정대회를 보자. 후원기관으로 법률관련 정부기관과 유명 법무법인이 함께한다고 홍보했지만 실질적인 대회 진행은 모두 학생이 했다. 홍보 때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학생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된다고 했지만 대회를 앞두고 전면 취소됐다. 이 대회에 참가한 고2 J 군(17)은 “전문적 법률지식이 필요한 민사, 형사 등의 모의재판을 학생이 운영하고 평가하다보니 행사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면서 “학생들끼리 평가하다보니 심사과정에서 친한 친구인 참가자에 대한 주관이 개입돼 상을 몰아준 경우도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점이 발견되는 가운데서도 학생 주최 대회에 대한 고교생의 관심은 줄지 않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대회는 일부 특수목적고, 자율형사립고 학생이 적극적으로 참가했지만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높은 관심 덕에 일반계고 학생의 참가도 크게 늘었다. 전국적으로 모집하다보니 3박 4일에 50만 원 정도의 적잖은 비용을 들여 서울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는 지방 학생도 많다.

각종 대회 참가 경험이 많은 고3 자녀를 둔 권모 씨(43)는 “실제로 공신력 있는 대회에서 상을 받을 수 있는 아이는 극소수”라면서 “부실한 대회인 줄 알면서도 입학사정관제를 대비해 스펙 한 줄을 넣기 위해 학생주최대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대학 입학사정관들은 사교육을 유발하는 어떤 대회도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김경범 교수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공동지침에 교외에서 실시되는 대회는 입학사정관전형에 전혀 반영하지 말라고 명시돼 있다”면서 “서울대 지원자 중에서도 각종 대회에 참가한 이력을 스펙으로 제시하는 학생이 있지만 평가에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대학이 준수해야 하는 대교협의 ‘입학사정관제 운영 공통기준’을 살펴보면 ‘대학은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인한 사교육이 유발되지 않도록 학생이 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학습,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평가 기준을 구성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지원자의 서류에 적힌 모든 대회는 대학별로 자체 검증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대학 입학사정관의 공통된 말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모 대학 입학사정관은 “상당수 대회에 대해 대학별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상황이며 특히 신생대회는 엄격한 조사를 하고 있다”면서 “일부 대학에선 ××기관에서 주최한 A 대회는 ○등급, B 대회는 ◇등급 등 매우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했다.

▼“모든 대회 대학 자체 검증…‘사이비 스펙’안통한다”▼

입학사정관이 평가하는 대회참가경력
‘수북이 쌓인 입학사정관전형 서류 중 어떤 것이 합격의 관문을 통과할까?’ 대학 입학사정관은 “무조건 많은 비교과활동, 사교육을 유발하는 대회 활동은 절대 좋은 스펙으로 평가받지 못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학 입학사정관전형에 지원한 수험생들의 전형 증빙 서류와 포트폴리오. 동아일보 자료사진
‘수북이 쌓인 입학사정관전형 서류 중 어떤 것이 합격의 관문을 통과할까?’ 대학 입학사정관은 “무조건 많은 비교과활동, 사교육을 유발하는 대회 활동은 절대 좋은 스펙으로 평가받지 못 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학 입학사정관전형에 지원한 수험생들의 전형 증빙 서류와 포트폴리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이 대학에 지원한 한 학생은 자기소개서에 모의 ○○대회 관련 활동이력 7건을 직간접으로 명시했다. 여기엔 이 학생이 직접 주최해 진행한 대회도 있었다. 입학사정관은 △행사의 규모나 진행과정을 볼 때 학생이 스스로 준비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후원이 있었다는 점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이 아니면 불가능한 사회적 인프라가 동원됐다는 점 등을 눈여겨보고 이 학생을 평가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입학사정관은 “개인적인 경비가 많이 드는 대회, 공식적인 선발 절차 없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 사설기관이 주도하는 1∼2년 미만의 대회 등은 신중하게 고려해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 교내, 교육청 주최…공신력 있는 대회에 나를 던져라!

그렇다면 어떤 비교과활동, 어떤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서울대 입학관리본부가 배포한 ‘서울대학교 입학사정관제 안내’ 자료를 살펴보자. 입학사정관제로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에 합격한 학생은 지방 도시의 일반계고에 다녔다. 항공우주공학자가 꿈이었던 학생은 교내 수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경력과 과학 관련 탐구보고서 작성 및 발표 대회에서 3명의 팀원을 구성해 ‘거북선의 구조’를 추측하는 프로젝트를 준비해 수상한 것을 지원 시 어필했다. 그는 “일부러 만들기 위해 만든 스펙이 아니다. 교내대회 참가, 학교장 추천을 통한 캠프 참여, 교사와 함께한 활동과 교내 동아리 활동을 잘 정리해 지원 시 제출했다”고 밝혔다.

서울대 김경범 교수는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면서 ‘스펙을 학교 밖에서 별도로 준비해야 한다’는 오해가 생겼지만 나열식 스펙과 꾸며진 포트폴리오는 입학사정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서 “무분별한 스펙 쌓기는 고등학교 생활에 불성실했다고 해석된다”고 말했다. 학교 밖에서 뭔가를 했다면 입학사정관은 먼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찾아보게 되며 그 사유가 납득될 만하지 않으면 학생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교내, 교육청, 교육과학기술부 등 대회 주최가 공교육 범위에 있는 대회에 집중하도록 하자. 영어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교내 영어대회 수상실적을 우선 쌓아야 한다. 교내 말하기 대회, 교육청 지구별 영어 토론대회에서의 수상은 검증되지 않은 기관의 해외 주최 영어대회에서의 수상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고교 교장과 교사들이 모여 만든 입학사정관 전형 대비 인터넷 사이트 ‘강남에듀드림’을 운영하는 서울 세종고 최윤희 학력신장 부장은 “관련 분야에 대해 외부 스펙만 많고 교내 대회 실적이 없으면 학교에선 상을 받지 못하는 실력에 돈만 쓰면 되는 외부 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서 “교내 대회를 우선순위로 두고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실시하는 대회를 준비해 공략하라”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 김창민 입학사정관은 “단순히 ‘스펙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대회를 전전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변질된 비교과활동에 쏟을 시간에 내신, 수능, 논술 등 기본 학습능력을 기르는 데 시간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 입학사정관전형 대비 각종 대회 선택 시 눈여겨볼 점

① 참가비용은 적절한수준인가?
② 공식적인참가자 선발절차가 있는가?
③ 정부나 교육청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의 주최와 지원으로진행되는대회인가?
④ 주최기관은 믿을 만한 곳인가?
⑤ 해결과제의 난이도는 어느 수준인가?
⑥ 수상자 수가 터무니없이많지않은가?
⑦ 대회에서평가의신뢰성이나 타당성이 있는가?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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