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2부]<8>민주주의를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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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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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정권 잇단 헌정파괴에 “민주의 종언” 정면대결 선언

1960년 4월 태극기를 앞세운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60년 4월 태극기를 앞세운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48년 7월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동아일보는 조각 과정 등을 지켜보면서 이승만의 정치 행태가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전근대적 전제 정치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직시한다.

동아일보 8월 7일자 사설은 결별선언이었다. “대통령은 자기의 우월성을 너무도 과신한 나머지 국회의 세력관계를 아예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정실을 경계하면서 스스로 정실에 흘렀고 당파성을 배척하면서 스스로 당파성을 초월하지 못한 것에 국민은 빈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는 이후 1960년 이승만이 하야(下野)할 때까지 정권의 끊임없는 탄압 속에서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 전시하 민주주의의 촛불

이승만 정권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지만 동아일보는 전시하에서도 국민방위군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 정부의 실정을 파헤치며 ‘야당지’가 됐다. 당국은 동아일보가 1951년 9월 25일자에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부사령관 윤익헌을 구하려고 미 고위층에 거금이 들어갔다는 경찰 조서 내용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편집인 고재욱과 기자 최흥조를 불구속기소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정면으로 반박했고 이를 계기로 중앙청, 국회 기자단 등이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에게 언론 관련 악법의 위헌성을 지적하고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전시하 언론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필화(筆禍) 사건이었다.

이후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 등 장기 집권을 위한 헌정 파괴가 계속되면서 권력과 언론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동아일보는 1952년 7월 9일 ‘자유와 질서’라는 사설을 통해 계엄하에서 행간의 의미를 전달했다.

“지난 4년간의 우리 민주정치의 공과 죄를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에 죄가 있다면 이는 헌법 그 자체의 결함에서보다는 그나마 이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더욱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한다.”

○ 민심을 대변하다

1955년 8월 도의원 선거가 끝난 뒤 호송 경찰관들이 투표함을 뜯고 야당 후보를 찍은 투표지를 여당인 자유당 후보의 투표지로 바꿔치는 ‘환표(換票) 사건’이 발생한다. 투표함 호송에 동행한 박재표 순경은 고민하다 동아일보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보도로 전국은 발칵 뒤집혔고 박 순경은 직무유기죄로 구속됐다. 10개월 옥고를 치른 박 순경은 동아일보 사원으로 특채됐다. 이후 정권의 지시를 받은 면장과 지서장 등이 가가호호 방문해 “야당지 동아일보를 봐서는 안 된다”며 압력을 넣기도 했다.

1958년 1월 23일에는 신문 만화를 허위보도로 몰아 최초로 제재한 고바우 영감 사건이 터졌다. 일반 가정의 변소를 치는 인부들이 대통령 관저의 변소를 치는 인부를 만나자 90도로 절을 하며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라며 인사하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김성환 화백이 즉결심판에 회부되자 1월 31일자 사설 ‘만화를 허위보도라니’를 통해 판결의 부당성을 알리고 비평에 성역이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관리 가운데는 대통령을 마치 군주국가의 원수처럼 신성불가침하고 비판을 절(絶)하는 존재로 착각하는 자들이 적지 아니한데, 민주공화국의 행정부 수반이 여론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4·19혁명의 견인차


신문 만화로는 최초로 허위 보도를 이유로 제재를 받은 1958년 1월 23일자 고바우영감.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신문 만화로는 최초로 허위 보도를 이유로 제재를 받은 1958년 1월 23일자 고바우영감.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58년 12월 24일 언론 규제 등을 겨냥한 보안법이 개정되자 동아일보는 사설 ‘민주주의의 종언’을 통해 독재정권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단기 4291년 12월 24일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늘을 최후로 종언을 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데굴데굴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획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금권과 폭력이 난무했다. 이에 앞서 동아일보는 3월 11일자 사설에서 부정선거가 권력의 심판대가 될 것임을 경고했다. “우리 국민은, ‘법이 올바로 시행되는 사회라면 형무소에 들어갈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받기를 원치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머지않아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을 확신해 마지않는다.”

동아일보의 경고는 현실로 나타났다. 4월 11일 마산 앞 해변에 당시 17세였던 김주열 군의 처참한 시신이 떠오르면서 경찰의 만행이 드러났다.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4·19혁명의 막이 오르자 이승만은 자유당과의 절연을, 이기붕도 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25일 사설을 통해 일련의 사태가 대통령의 책임이고 3·15 부정선거의 취소와 재선거, 책임자 처벌 등을 촉구하며 독재 정권의 책임을 추궁했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 하늘에 호외가 뿌려지는 동안 동아일보 깃발을 단 취재차량이 지나가면 박수가 나왔고, 군중들이 이기붕의 집에서 찾은 현금 2000만 원을 동아일보에 기탁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로서는 사시(社是)의 하나인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李박사는 실정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급급” ▼
인촌, 부통령 1년만에 물러나며 사퇴이유서에서 거침없는 비판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는 그 자신이 과거 4년간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여 왔으므로 모든 실정의 책임은 마땅히 그 자신이 져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1952년 5월 29일 열린 국회 본회의. 당시 부통령이었던 인촌 김성수의 ‘부통령 사임 이유서’를 비서관 신도성이 대신 낭독했다. 1951년 5월 9일 방만한 정부 운영에 불만을 표시하며 사퇴한 이시영의 뒤를 이어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된 지 약 1년 만의 일이었다.

인촌은 취임 초기 이 대통령의 권유로 국무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때때로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권위주의를 경계해 ‘각하’라는 칭호를 폐기하도록 국무회의에서 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취임 약 40일 뒤인 1951년 6월 26일 이후 인촌은 국정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전 국방장관 신성모를 주일대사에 임명한 대통령의 결정에 실망한 데다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신성모는 1·4후퇴 당시 국민방위군 고급 장교들이 국고와 군수물자를 착복해 아사자와 동사자가 속출한 국민방위군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으로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인물이었다.

사퇴이유서는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가득하다.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혐오하고 아부만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가운데…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 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촌이 이 대통령을 비판한 것은 그의 행동이 한국 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인촌은 이 이유서에서 의원내각제에 대한 희망을 밝히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했다. “나는 평소부터 국무원책임제만이 우리나라의 국정에 적합한 제도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의 사태는 나의 이 확신을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나는 우리 국민을 빨리 민주화하기 위하여는 한 사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강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현행 대통령제를 개변(改變)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것을 통감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52년 4월 국회에서는 전체의 3분의 2 이상인 국회의원 123명이 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 측 개헌안에 국회의원들이 낸 개헌안의 극히 일부만 덧붙인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통과됐다. 당시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한 채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인촌은 “내가 한 번도 현 정부의 악정에 가담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의 변변치 않은 이름을 이 정부에 연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내 성명 삼자를 더럽히는 것이며 민족만대에 작죄를 하는 것”이라며 부통령에서 물러난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4·19 사흘뒤, 희생자 위해 국민성금운동 ▼
두달만에 7739만환 답지

동아일보가 4·19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시작하자 각계의 성원이 쇄도했다. 해외에서도 위문금품을 보내왔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성을 보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가 4·19혁명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시작하자 각계의 성원이 쇄도했다. 해외에서도 위문금품을 보내왔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정성을 보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60년 4월 20일 당국은 4·19혁명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111명, 부상자는 561명이라고 발표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연일 위문금품을 전달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고 이에 호응해 동아일보는 4월 22일부터 4·19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하기 시작했다.

위문금품 접수는 일주일 만에 665만4636환(2010년 7월 환산금액 약 6200만 원·쌀 기준), 물품 1만3207점이 답지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위문금품 접수는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제약회사에서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알보민’ 혈청 등을 전달했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노점상인도 내의 10점을 보내왔다. 이 밖에도 계란, 금반지, 오렌지주스, 치약, 칫솔 등 다양한 물품이 접수됐다.

위문금품 액수는 그해 6월 21일까지 7739만4601환(약 7억21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경제수준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동아일보는 4월 24일부터 ‘4월혁명순국학생위령탑’ 건립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즉각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전국에서 272만 환(약 2500만 원)의 성금이 답지했다. 동아일보도 별도로 134만 환(약 1250만 원)을 기부했다. 하지만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4·19혁명 기념사업을 책임지게 됐고 동아일보는 1962년 기탁된 성금 전부를 인계했다.

1963년 9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희생자를 위한 묘지가 건립됐고 묘지 중앙에는 4월학생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동아일보의 4월혁명순국학생위령탑 건립운동에서 출발한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묘지는 4·19혁명 당시 산화한 영령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됐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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