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등 공공주택에도 전통한옥의 디자인을 적용하는 게 최근 추세다. 사진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한옥의 안마당을 공동주택에 도입한 실내 디자인. 동아일보 자료 사진
디자인회사를 운영하는 권재혁 씨(36)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82.5m²짜리 한옥에 2년째 살고 있다. 그간의 아파트 생활에 답답함을 느낀 데다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 간 관계도 소원해지면서 한옥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권 씨의 집은 기와나 처마, 기둥 같은 외관은 전통한옥의 모습 그대로지만 내부는 모두 현대식으로 꾸몄다. 부엌엔 식탁과 의자들을 놨고, 잠은 침대에서 자는 등 생활은 아파트에서 살 때와 거의 비슷하다. 그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앞마당이 생긴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마당을 거닐 때마다 고향에 온 듯한 포근함을 느낀다. 권 씨는 “친구들이 놀러오면 ‘별장 같다’고 부러워한다”며 “사람들이 한옥 생활은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보통 집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권 씨처럼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아파트 주거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한옥을 실제 주거의 대안으로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정부가 대대적인 한옥 대중화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과거 전통가옥의 보존과 관리에 치중했던 것에서 실제 주거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옥을 공급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이다. 14일 국토해양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한옥의 집값을 대폭 낮추고 현대식 한옥 건축에 필요한 기술개발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이달 중 이를 확정할 예정이다.
○ 주거용 한옥 연 5000채씩 늘리기로
한옥은 요즘 TV 드라마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30, 40대에도 실제 주거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맞춰 정부도 한옥의 대중화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 북촌 한옥마을 전경. 전영한 기자 정부는 우선 보금자리주택지구 등 땅값이 싼 공공택지에 주거용 한옥 단지를 조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공공택지의 단독주택용지 가운데 일부를 떼어 내 한옥만 지을 수 있는 땅으로 지정하고 이를 민간에 공급하는 방안을 연구 중”이라며 “이렇게 되면 싼 가격에 토지를 공급할 수 있어 그동안 비싼 집값 때문에 한옥에 살기를 꺼렸던 수요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한옥은 아파트에 비해 한정된 땅에 지을 수 있는 가옥 수가 적고, 재료비와 인건비를 비롯한 건축비도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현재 3.3m²당 1000만∼2000만 원에 이르는 건축비를 평균 단독주택 가격 수준으로 절반 가까이 떨어뜨려 주거용 한옥을 중산층과 서민에게 보급할 계획이다. 또 한옥을 값싸고 현대적으로 지을 수 있는 기술과 설계도면, 자재 개발을 위해 매년 약 100억 원씩을 지원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 같은 정책을 통해 주거용 한옥을 매년 5000채씩 늘린다는 방침이다.
○ 땅값 부담 줄이는 게 관건
한국인의 가장 기본적인 주거형태이던 한옥은 1960, 70년대 아파트 건설이 보편화되고 도시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2008년의 한 정부 조사에 따르면 한옥은 서울 1만9000여 채를 포함해 전국에 5만4000여 채만이 남아 있다. 이처럼 한옥의 멸실(滅失) 우려가 부각되면서 정부의 초기 한옥 관련 정책은 철저히 기존 가옥의 보존 및 관리에 집중됐다.
한옥을 주거용으로 대중화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큰 이유는 한옥을 지을 만한 저렴한 땅이 부족했다는 것. 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은 “한옥의 가격 부담을 줄이려면 도심지 근교에 택지를 저렴하게 공급하고 건축비 절감을 위해 한 곳에 50채 이상 다량으로 지어야 한다는 대안을 정부에 제시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구상하는 주거용 한옥은 옛날 전통한옥이 아닌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개량한 ‘신한옥’이다. 기와나 처마 등 외관은 전통적인 목(木)구조 방식으로 꾸미고 최대한 자연재료를 사용하되 내부는 철저히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2008년 설문에서도 한옥 거주를 희망하지 않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이 ‘현대적인 생활을 하기에 불편하다’(37.9%)는 점이었다. 비록 자연통풍이나 채광, 온돌 등 한옥의 친환경 기능은 유지해야 하지만 부엌이나 화장실처럼 그동안 불편하다고 여겨졌던 부분은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기술개발로 이 같은 현대식 한옥의 건축 비용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다. 현재 한옥은 재료값이 비싼 데다 철저한 수작업에 의존하기 때문에 건축비가 일반 단독주택보다 3, 4배 높고 전통 공법을 현대화, 대량화하는 기술도 걸음마 단계다.
김왕직 명지대 교수는 “신한옥 건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겨울에 대비한 단열 기술”이라며 “또 건축비의 30%가량을 차지하는 기와도 일본이 수명이 수십 년 가는 왜식 기와를 만들어낸 것처럼 방수효과 등 성능이 개선된 한식 기와를 개발해 공사비를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민간위원인 김영섭 성균관대 교수는 “한옥 건축에선 택지비와 인건비를 얼마나 낮출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며 “주된 재료가 되는 목재는 가격도 비싸고 화재에 취약한 만큼 안은 철골로 제작하고 겉을 나무로 싸는 하이브리드 방식도 검토되고 있다”고 전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