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녹색열풍’에 영국이 신바람 난 까닭은?

  • 입력 2009년 6월 12일 03시 03분


한국 ‘녹색규제’ 사례 근거로 中-印 등 압박

1조달러 규모 저탄소 기술시장 선점 전략

정부 “남이 시켜 하느니…”9월 녹색성장 법안 확정

대외협상력 제고 나서

《마틴 유든 주한 영국대사는 4월 비공식적으로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을 찾았다. 한국의 녹색법안 마련에 관여하고 있는 국내 정계 인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유든 대사가 의원들을 만나 한국이 녹색규제법안을 만드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 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안다”며 “요즘 국회에선 녹색법안 제정을 둘러싼 선진국들의 정책 로비가 뜨겁다”고 전했다.》

한국의 녹색규제 마련을 위한 영국의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주한 영국대사관은 현재 14억 원의 재원을 풀어 녹색 이슈 연구 및 활동에 관여하는 국내 4개 기관을 지원하고 있다. 그 대상은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민간 ‘싱크탱크’부터 환경시민단체, 정부 부처 산하 환경기술연구소 등이다. 주한 영국대사관 내에는 아예 이런 ‘녹색업무’만 전담하는 기후변화팀까지 별도로 설치돼 있을 정도다. 대사관의 토니 클렘슨 기후변화팀장은 “녹색 이슈는 주한 영국대사관 내 전 부서에서 업무 최우선 순위로 다뤄지는 문제”라며 “대사관 전체가 녹색 이슈에 관여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왜 한국에 녹색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이처럼 공을 들이는 것일까. ‘지구의 파수꾼’이 되려는 범인류적 목적 때문일까, ‘녹색 장사꾼’으로서 다른 계산이 있는 걸까.

○ 한국은 영국의 ‘녹색 패권’ 전략 카드?

영국은 예전부터 기후변화 문제를 포함한 환경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가장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왔던 나라다. “국제사회가 하루빨리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지 않는다면 세계 기온이 급격히 올라 인류는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미국, 중국 등 이산화탄소 다(多)배출 국가들이 감축 노력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외쳐왔다.

사실 한국의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이 세계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최근 몇 년간 배출량이 빠르게 늘었다고는 해도 세계 1, 2위 배출국인 미국(21.4%)이나 중국(18.6%)에 비하면 한참 낮다. 그런데도 영국이 한국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한국이 다른 개발도상국의 녹색규제를 압박할 수 있는 ‘전략적 카드’이기 때문이란 것이 정치권과 외교가의 분석이다.

현재 한국은 개도국(교토의정서 기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부 차원에서 스스로 나서서 선진국 수준의 녹색성장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다. 이와 연계된 강도 있는 녹색규제법안 마련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다른 개도국들이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제 등 선진국 수준의 규제안에 ‘아직은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교가의 한 관계자는 “한국의 녹색규제 사례를 근거로 다른 개도국들에도 규제안 마련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국의 관심이 특히 높다”고 설명했다.

○ 세계 녹색시장에 선진국 ‘군침’

글로벌 녹색규제가 강화되면 선진국들은 ‘지구 환경 수호’라는 효과뿐 아니라 막대한 규모의 ‘경제적 시장’을 창출하는 효과 또한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녹색규제 관련 논의를 진행해 온 영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풍력, 태양광 발전 및 하이브리드차 등 녹색기술 부문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다. 수출 경쟁력이 상당하다는 뜻이다.

영국기업연합(CBI)은 올해 초 펴낸 기후변화대응보고서에서 “세계적으로 확고한 녹색협약이 체결된다면 시행 5년 안에 1조 달러 상당의 저탄소 기술시장이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기업의 한 관계자는 “이산화탄소 배출제한 등 녹색규제가 현실화할 경우 이에 따르기 위한 관련 기술이나 장비는 상당 부분 해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며 “특히 녹색 관련 기술이나 정책은 이미 영국 등 선진국의 것이 ‘국제표준’처럼 간주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은 비단 기술이나 제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금융시장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바로 ‘탄소배출권 거래시장’ 때문이다. 현재 유럽기후거래소는 영국 런던에 있다. 이곳은 유럽연합(EU) 배출권 거래 시스템(ETS) 거래의 87%가 이뤄지는 탄소시장의 허브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의 장현숙 연구원은 “영국은 탄소 거래에서 이미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며 “금융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국이 산업혁명, 금융혁명에 이어 탄소혁명으로 제3의 글로벌 패권을 잡으려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전했다.

○ 산업계 ‘녹색 파고’ 속앓이

‘선진국들에 의해 이미 세계 시장의 판이 짜여진’ 이런 상황을 두고 한국도 하루빨리 ‘녹색성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데에는 정부와 학계, 산업계의 시각이 일치한다.

외교통상부 에너지기후변화과의 김효은 기후변화팀장은 “남은 문제는 ‘남이(국제사회가) 시켜서 할 것이냐, 아니면 우리 스스로 할 것이냐’의 차이뿐”이라며 “하루빨리 우리 스스로 녹색규제와 성장비전을 구축해야 12월 열리는 국제환경회의(코펜하겐 회의)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정부는 9월까지 저탄소 녹색성장 법안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규제 마련의 ‘스피드’와 ‘강도’에 대해서는 정부와 산업계 간 입장차가 적지 않다. 특히 산업계는 법안에 포함된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제에 꽤나 속앓이를 하고 있다. 국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 비중이 적은 영국(국내총생산 기준 13% 차지)과 달리 국내 산업은 ‘굴뚝산업’의 비중(30%)이 높아 이 같은 규제 도입 시 산업경쟁력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며 “그러나 정부가 나서서 녹색성장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보니 기업들이 대놓고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국내 산업계는 국내에 탄소세가 도입될 경우 철강, 운수, 금속, 화학 부문 등의 제품가가 1∼5% 높아질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국내 에너지기업에서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또 다른 관계자는 “기업들도 신재생에너지 등 녹색기술 역량을 강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실제 그런 기술이 그렇게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며 “선진국에 비하면 출발도 늦은 데다 연구 예산마저 충분치 않아 부담이 크다”고 토로했다.

이에 따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철강협회, 대한석유협회등 17개 국내 주요 산업단체는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건의서 형태의 보고서를 작성해 4월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