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LEET/조건선택 비판형 문제

  • 입력 2009년 4월 27일 02시 58분


《법학적성시험(LEET)의 논술 2번에 나오는 ‘조건선택 비판형’ 문제는 비교 요약형인 1번 문제와 달리 자신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문제로 제시된 논제들은 참, 거짓을 가리는 사실명제가 아니다. 어떤 주장이든 그 나름대로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가치명제이다. 따라서 명제의 옳고 그름을 밝히기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주장의 타당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답안은 600∼800자 정도의 분량으로 작성한다. 답안지를 작성할 땐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하자. 첫째, 자신의 입장을 정확하게 밝힐 것. 둘째, 제시된 조건을 빠뜨리지 말 것. 셋째, 문제를 풀 때 50분을 넘기지 말 것. 작년 실시된 제1회 기출문제를 통해 이번 문제의 유형을 익혀보자.》

○ 문제

제시문 (나)와 (다)의 주장 차이를 밝히고 그중 한 주장의 논거를 근거로 하여 제시문 (가)의 견해를 옹호하거나 또는 비판하시오.(600∼800자·30점)

「(가) 성리학은 힘써 도를 구명(究明)하고 자신을 앎으로써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바를 실현하는 학문이다. 옛날에는 도를 배우는 사람을 일러 ‘사(士)’라 하였는데 원래 ‘사’란 ‘벼슬하다(仕)’라는 뜻이다.

즉 위로는 제후의 조정에서, 아래로는 대부(大夫)의 집안에서 주군을 섬기고 백성을 이롭게 하여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을 ‘사’라 하였다. 이들은 백이와 숙제처럼 인륜이 무너지는 변란을 당했을 때에만 숨어 살고 다른 때에는 숨어 살지 않았다. 그래서 성인은 평소에 숨어 살며 기이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은사(隱士)라고 자처한다. 몇 대째 이어지는 명문 집안 출신임에도 기쁨과 슬픔을 세상과 함께하지 않고 있다. 조정에서 예를 갖춰 수차례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조차 학문을 닦는다며 산으로 들어간다.

주자는 육경을 깊이 연구하여 참 거짓을 판별하였고, 사서를 밝게 드러내어 심오한 이치를 내보였다.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할 때에는 곧은 말과 격한 논의로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채 군주의 은밀한 과오를 공박하였고 권신이 꺼리는 사안을 건드렸으며 천하의 대세를 논의하였다.

금(金)나라에 복수하고 치욕을 씻어 대의를 후대에까지 길이 펼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나와 지방관이 되어서는 법규를 너그럽게 집행하였고 풍속을 상세히 살펴 조세와 노역을 공평하게 하였으며 기아와 역병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의 강령과 세칙은 나라를 다스리기에 충분하였다. 나아가고 머무름에 바른 도리를 지켰으니 나라에서 부르면 나아가고 버리면 묻혀 살며 군주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감히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학문 풍토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자를 빌려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자를 기만하는 자들일 따름이다.

(나) 인간의 덕스러움, 즉 훌륭함에는 정의롭게 혹은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과 같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는 훌륭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의 모든 것이 아니다. 관조적 탐구를 통해 발휘되는 훌륭함도 있다.

더구나 이런 훌륭함이 인간이 도달하게 될 최고 수준의 훌륭함이며 이런 것이 두드러진 삶이 인간적 삶 중에 최고의 삶이다.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과 능력 가운데 지성이 가장 숭고한 데다가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성과 지혜(sophia)는 관조적 탐구를 행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관조적 탐구가 주는 즐거움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탐구가 주는 즐거움은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즐거움이다. 다른 즐거움은 지속적이지 않지만 탐구의 즐거움은 지속적이다.

나아가 이른바 자기 충족이라는 것도 탐구의 삶에서 온전히 가능하다. 지혜를 가지고 탐구하는 사람이나 정의로운 사람, 그 밖의 다른 훌륭함을 가진 사람 모두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경우에도 정의로운 사람은 그가 정의로운 실천적 행동을 하게 될 상대방 혹은 정의로운 행동을 같이 하게 될 동료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 절제있는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 그리고 그 밖의 실천적 덕을 갖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 충족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지혜를 기반으로 탐구하는 사람은 혼자서도 훌륭하게 자신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자기 충족적이다.

(다) 탐구에서 비롯되는 의무보다 공동체로부터 나오는 의무가 우리의 본성에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다음 논증에 의해 입증된다.

먼저 어떤 지혜로운 자가 최고의 풍요 속에서 최고의 여유를 누리면서 탐구의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홀로 그리고 스스로 관조하고 고찰하는 삶을 산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홀로 된 삶이 다른 사람을 볼 수 없는 삶이라면 그는 ‘삶’에서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소피아(sophia)라고 부르는 지혜는 모든 덕(德) 가운데 으뜸이다. 이 지혜는 신적인 것과 인간사에 관한 앎이다. 이 앎에는 신들과 인간의 공동체 및 유대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 이 앎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사실 가장 중요하다. 공동체에서 나오는 의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틀림없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자연과 우주에 대한 탐구와 관조는 이로부터 현실에 대한 어떤 행동도 비롯되지 않는다면 시작만 있고 무언가 완성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동이야말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에서 잘 드러나므로 인간 종(種)의 결속에 적합한 것이다. 그러므로 탐구보다 행동을 우선시할 만하다.」

○ 예시답안 1: 모범생형

먼저 제시문 (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논술을 작성하는 순서를 살펴보자.

① 주제는 ‘학자(지식인)의 현실참여 여부’다.

② 논제를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로 잡는다.

③ (나)의 요지는 ‘순수하게 학문을 탐구하는 지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이는 특히 자기 충족적이라 다른 삶과 비교되지 않는다’로 정리된다.

④ (다)의 요지는 ‘개인의 탐구가 가치를 발휘하려면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정리된다.

⑤ (나)와 (다)의 차이는 탐구의 궁극적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의 즐거움에 가치를 두면 (나)를, 사회적 기여에 가치를 두면 (다)를 지지하게 된다.

⑥ 논제에 맞춰 (다)를 근거로 (가)를 옹호한다.

이를 토대로 글을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식인의 사회참여 여부는 예나 지금이나 양가성(兩價性)을 띤 논의 중 하나다. 제시문 (나)에 나타난 것처럼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관조적 탐구’만이 최고의 지성에 다다를 수 있다는 주장과 제시문 (다)와 같이 삶에 밀착된 지식이야말로 ‘완성된 지식’이란 입장 모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두 주장 모두 긍정적인 가치인 만큼 부정적인 결과도 수반한다. 사회참여를 강조하다 보면 시속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므로 학자로서의 시각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자기 충족성을 극대화하다 보면 오히려 ‘순수한 탐구’로 지식의 어용을 방관하거나 동조하게 만든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런 문제를 감안하면 제시문 (가)의 견해는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되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학자로서의 바른 태도를 진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인의 지식은 결국 사회에서 완성된다는 (다)의 주장처럼 학문 탐구의 궁극적 가치는 공동체를 위한 실현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학자의 관조적 자세가 중요한 이유도 곡학아세를 막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부여된 의무에 충실해야 할 이유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학자들의 지식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면 그런 지식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 역시 그들에게 있다는 인식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어진 사회적 위치만큼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가)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리가 있다. (718자)」

○ 예시답안 2: 우등생형

이번에는 제시문 (가)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답안을 작성해 보자.

글을 쓰는 순서는 ‘예시답안 1’과 동일하되 논제를 ‘관조적 탐구를 수행하는 것이 학자 본연의 자세다’로 잡는다. 이렇게 되면 (나)와 (다)의 요지는 같지만 학자의 탐구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입장 차이가 생긴다. 학문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진리탐구에 가치를 두면 (나)를, 학문을 수단으로 보고 사회적 유용성에 가치를 두면 (다)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제에 맞춰 (나)를 근거로 (가)를 비판하면 된다.

「지식인의 현실 참여 강조는 일면 타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학자가 사적인 영역에서 학문을 탐구해도 그 결과물인 지식이 사회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시문 (다)에서 주장하듯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탐구란 가치가 없으며 구성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게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결과중심의 사고로 학자들에게 시속에 편입할 것을 강요하게 된다. 반면 (나)에서 주장하는 자기 충족적 영역으로서 학문탐구는 탐구자 개인에게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현재보다 더 나은 지성과 지혜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학문을 다른 분야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제시문 (가)의 주장은 비판받을 만하다. (가)의 필자는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생활을 추구하는 학자들을 비난한다. 이는 학자들이 추앙하는 주자의 사고방식과도 배치되므로 자기 합리화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다 정치에 참여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오히려 이렇게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이야말로 탐구의 독자성과 학자의 자율성을 부정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여 공동체의 이익에 반할 수 있다.

학자가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학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궁극의 진리를 찾고자 탐구하는 학자야말로 학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 관조적인 자세가 좀 더 진리에 근접하게 할 것이며 그랬을 때 그런 지식이 오히려 사회에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786자)」

이 밖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다. 자기의 입장을 선택해 답하는 논술 문제는 같은 제시문이라도 논제에 따라 논거를 활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향을 고려해 입장을 선택하고 답안을 작성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도록 하자.

강영원 PLS 언어이해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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