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들에 性미끼로 軍기밀 수집 ‘한국판 마타하리’

  • 입력 2008년 8월 28일 02시 58분


검거된 여간첩 원정화 씨의 앨범에는 한국과 북한, 중국을 오가며 찍은 원 씨와 원 씨 가족의 사진 100여 장이 담겨 있다. 원 씨가 국내의 어느 바닷가로 보이는 곳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
검거된 여간첩 원정화 씨의 앨범에는 한국과 북한, 중국을 오가며 찍은 원 씨와 원 씨 가족의 사진 100여 장이 담겨 있다. 원 씨가 국내의 어느 바닷가로 보이는 곳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
15세때 남파훈련→부상제대→총살위기→공작원

中서 남한 사업가 - 탈북자 등 100여명 납치 관여

임신 7개월 상태서 남한 입국해 탈북자 위장자수

장교 여러명과 교제… 명함 - 사진 등 북한에 넘겨

“황장엽씨 소재파악 지령 못지켜 北보복 두려웠다”

■ 여간첩 원씨의 ‘영화같은 삶’



군 간부와의 친분관계를 이용해 군사 정보를 빼낸 ‘탈북 위장 남파간첩’의 첫 사례인 원정화(34·여) 씨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출신 성분이 좋았던 집안 덕에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낸 그는 1989∼1992년 특수부대의 남파 공작 훈련 도중 다쳐 제대했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원 씨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쳤다가 교도소에 수감됐고, 다시 아연을 훔쳐 북한 당국에 적발됐다. 당시 북한은 아연 1kg만 훔쳐도 총살형에 처했지만, 원 씨는 형편이 어려운 친구를 돕겠다며 아연을 무려 5t이나 훔쳤다고 한다.

북한 고위층인 친척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절도 사건을 무마한 원 씨는 1998년 다시 남파 공작원의 길에 들어섰다.

북한 국가안전 보위부 공작원으로 기본교육을 받은 그는 1999∼2001년 중국 지린(吉林) 성 일대에서 남한 사업가 7명과 탈북자 100여 명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데 관여했다.


▲ 영상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전영한 기자

남한 침투 지령을 받은 원 씨는 2001년 4월 남한 사업가의 아이를 임신했다. 비슷한 시기 그는 조선족 ‘김혜영’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국인과의 결혼을 시도한다.

임신 상태로 한국인과 혼인하는 조선족으로 위장한다면 간첩으로 의심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

2001년 10월 입국한 그는 주한미군기지 6곳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조금씩 임무를 수행했고, 국가정보원에 찾아가 자신이 탈북자라고 위장 자수했다.

키 158cm에 비교적 통통한 편인 원 씨는 남성들의 환심을 살 정도로 외모가 빼어난 편이었고, 주량이 소주 7병일 정도로 성격도 활달한 편이었다.

2005년 9월 그는 서울의 한 결혼정보업체에서 여러 명의 군 장교를 소개받았고, 이때부터 군 장교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원 씨는 군 장교들에게 명함을 달라고 한 뒤 그 명함과 사진 등 100여 장을 그대로 북측에 전달했다.

김모 소령에게는 포섭 목적으로 중국 방문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다. 원 씨는 또한 2006년 11월 모 사단의 정훈 장교로 근무하던 육군 대위 황모(26) 씨를 만났다. 황 씨와는 진짜 연인이 됐으며, 원 씨는 황 씨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 가입시켜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는 계획까지 세웠다.

원 씨는 한국에 입국한 2002년 10월부터 2006년 12월 총 14차례에 걸쳐 중국의 북한 보위부를 방문해 대남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새로운 지령을 받았다.

원 씨가 북측에 제공한 정보는 군부대와 국정원 등 국가 주요 시설 위치, 하나원 동기 및 탈북자 출신 안보강사 명단, 군 장교의 명함과 사진 등이다.

중요 정보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간 탈북자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2007∼2008년에는 일본 센다이(仙臺)도 세 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남한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원 씨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 씨의 소재지를 파악하라는 지령도 주어졌지만 원 씨는 탈북자 단체 간부에게 “황 씨와 만날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중도에 포기했다.

대북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남한 측 요원 2명을 살해하라는 임무와 함께 독약과 독침을 북측에서 받았지만 그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원 씨는 주요 지령이 계획대로 되지 않자 북측에서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자물쇠 4개로 집 문을 잠근 뒤 생활하기도 했으며, 한때 자수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수사팀에 붙잡힌 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고 한다. 원 씨는 2006년 5월 중국을 거쳐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동생을 만나기도 했다. 지난달 15일 검거된 원 씨는 처음에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으나, 최근 수사팀의 추궁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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