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가 근래 이렇게 목소리가 컸던 적이 있었나 싶다. 남북 대화가 오갔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본 적이 없는 전투력이다. 최근 한미 간 대북정책 협의 개최를 둘러싸고 ‘대북정책 협의 주체는 통일부’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더니 외교부가 주도하는 회의 전날 “제2의 ‘한미 워킹그룹’”이라고 비판하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미국과 별도로 협의 채널을 구축해 직접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을 논의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이런 자신감이 비단 대선 후보를 지낸 ‘2회차 장관’ 정동영 통일부 장관 때문만일까. 통일부가 회의 불참을 밝힌 15일, 임동원 정세현 등 전직 통일부 장관 6명은 “대북정책을 외교부가 주도하는 것은 헌법과 정부조직법 원칙에 반한다”며 대북정책 협의 가동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특히 정 전 장관은 새 정부 출범 후 앞장서서 쓴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9월 국회에선 “대통령이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붙드는 세력이 정부 안에 있다”며 “이른바 동맹파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국가안보실을 겨냥한 듯 “대통령 측근 개혁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달 초 포럼에선 국가안보회의(NSC) 구조를 두고 차관급 차장들이 왜 장관급 NSC에 들어가느냐며 보수 정부에서 시작된 관행이라고 작심 비판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현 NSC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운영돼 온 구조라고 설명했지만 사실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모습도 없다.
정 전 장관이 화두를 던지면 정 장관이 받아 메아리치는 패턴도 반복되고 있다. 정 전 장관의 ‘측근 개혁’ 요구 직후 정 장관은 “대통령도 같은 문제 의식을 갖고 있다”며 NSC 구조 비판에 나섰다. 외교부와 국방부 출신들로 꾸려진 NSC 구조상 통일부 발언권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며 자신이 상임위원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장관은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과 NSC 상임위원장을 겸했다.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자주파’ 올드보이(OB)들은 남북 관계를 망친 주범으로 ‘전문성 없는 외교부’ ‘사사건건 미국의 결재를 받아야 했던 한미 워킹그룹’을 지목한다. 하지만 그들이 대북 정책을 주도하던 대화 국면에도 북한은 핵 고도화를 멈추지 않았다. 20여 년간 대화도, 제재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목표를 이루지 못했는데도 “북한에 선물 보따리를 챙겨줘야 한다”며 과거로 회귀하려 한다. 공무원들 사이에선 “정 장관이 ‘전에 말한 것 있잖냐’고 지시해서 알아보면 2004년, 2005년 문서들뿐”이라는 푸념도 들린다.
통일부가 대북정책 자율권을 쥐어선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통일부 주변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OB들이 ‘딥 스테이트’(막후 권력)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만큼 그들의 20년 전 사고 방식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이야기다. 남북 관계를 우선하는 프레임으로 NSC를 운영하기엔 지정학적 변수도 복잡해졌다. 조율과 조정 기능이 최우선인 NSC를 ‘주도권’ 운운하는 특정 부처 장관이 이끌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바늘구멍이라도 뚫어야 한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북한과의 대화 의지는 외교안보 ‘원팀’이 돼도 실현하기 힘들다. 자주파 원로들의 경험과 통찰이 동맹파 저격 대신 생산적인 대북정책 협의에 투입되길 바란다. 19일 외교부·통일부 대통령 업무보고에선 부디 소모적인 기싸움이 마무리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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