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중인 딸 만나겠다” 가짜 출장 나랏돈 펑펑

  • 입력 2008년 6월 20일 03시 01분


감사원 “2005~2007년 공공기관 외유경비 1조원”

“딸이 다니는 학교 방문 일정 넣어라.”

경기도 공무원인 A 씨는 2005년 ‘수자원 및 생태공원 선진지 연수’를 명목으로 부하 직원 3명과 함께 11일 일정의 미국 출장을 계획했다.

A 씨가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공부 중인 딸에게 가야 한다고 하자 부하 직원들은 방문할 생각도 없는 시애틀 시청, 캐나다 밴쿠버 환경청 방문을 허위로 일정에 끼워 넣었다. 결국 이들은 11일 동안 약 2041만2000원의 예산을 썼지만 실제 ‘연수’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정수·하수처리장 딱 1곳이었다.

감사원은 지난해 6월 공기업 감사들의 ‘외유성 남미연수’로 불거진 공무국외여행 실태에 대해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 603개 기관을 대상으로 같은 해 6, 7월 집중 감사한 결과를 19일 공개했다.

감사원은 “2005∼2007년 3년간 정부와 공공기관 소속 임직원 25만7031명이 1조 원에 가까운 경비를 쓰면서 공무국외여행을 다녀왔다”며 “공무국외여행은 글로벌 시대에 대응하기 위한 중요한 업무과정이나 이를 해외관광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과 느슨한 태도가 문제”라고 밝혔다.

▽관광인지 연수인지…=한국산업은행은 2005년부터 서울대 산하 모 연구소에 ‘산은MBA과정’ 직원 위탁교육을 실시하면서 매 학기 해외연수와 해외 산업시찰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말이 연수, 시찰이지 실제 프로그램은 달랐다. 전 일정 관광으로 프랑스 그리스 스페인 베트남 등 유럽과 동남아 명소를 다녀왔다. 2005∼2006년 2년 동안 108명이 6억7000만 원을 썼다.

전남도 의회 소속 의원과 시군 공무원 등 17명은 2005년 9월 해외축제 견학 계획서를 만든 뒤 여행사 프로그램에 따라 유럽 4개국 명소를 방문했고 한국전력 직원들은 2006년 이미 종료된 해외포럼에 참석한다며 허위로 출장계획서를 작성한 뒤 실제로는 스위스 관광 일정으로 채웠다.

▽여비 ‘편법’ 조달, 다른 기관에 떠넘기기=여비를 편법 조달하거나 배우자를 동반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농수산물유통공사는 2005∼2006년 농수산물안정기금 4300만 원을 직원 여행경비로 사용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금융감독원, 한국마사회 등 4개 기관은 공무수행과 전혀 관계없이 배우자를 동반한 사례가 다수 적발돼 예산을 낭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용역이나 여신 등 이해관계가 있는 업체가 여행경비를 부담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국회의원 ‘로비용’ 여행도 여전했다.

한국가스공사는 지난해 국회의원 7명을 ‘모시고’ 이집트 등을 방문해 7087만 원이나 썼다. 한국마사회는 2005∼2007년 일부 농림해양수산위원회 국회의원들과 뚜렷한 현안 없이 ‘경마산업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매년 홍콩, 뉴질랜드, 호주 등을 찾았다. 의원과 국회 직원의 여비뿐 아니라 ‘연회비용’까지 포함해 모두 약 3억70만 원을 뿌렸다.

기획예산처는 지난해 1월 주요국 중기재정계획 수립과정 연구를 위해 유럽을 방문하면서 여비 5000여만 원을 KOTRA에 떠넘겼고 산업은행은 2005∼2007년 국외여행 568건 가운데 88건을 자신들이 지원한 건설사 등에서 부담하게 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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