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 입력 2008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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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결따라 사형된 소크라테스… 민주주의가 그를 죽였나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는가? 이 물음에 대해 소크라테스(기원전 469∼기원전 399)의 제자인 플라톤은 서슴없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세계사에서 아주 유명한 재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는 28세의 플라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한 변론 내용을 기록한 ‘변명’과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제자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쓴 ‘크리톤’과 ‘파이돈’을 통해서 이 재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저작물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실제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의 제자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서 내세운 인물이다.

물론 초기의 작품 중에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들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에 대한 플라톤의 묘사 가운데 어디부터가 소크라테스 자신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플라톤의 생각인지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많은 학자는 플라톤이 자신의 저작에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빌려 사실상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은 멜레토스라는 사람이었지만 사실상 그 뒤에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아니토스 일파’가 있었다.

아니토스는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았던 30인 참주 정치에 맞서 아테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전 재산을 몰수당했던 ‘민주투사’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자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시민들의 화해’를 위해서 자신들을 괴롭힌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아니토스 일파’가 일흔이 다 된 가난한(소크라테스는 경제적으로 무능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처’ 크산티페로부터 끊임없는 ‘바가지’에 시달렸다.) 철학자를 법정에 고발하고, 사형까지 요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소크라테스 재판이 있었던 시기의 아테네의 사회적 분위기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아테네는 원래 상당히 아량 있고 관용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전쟁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많은 피가 흐른 데다 전쟁이 끝나자 스파르타의 조종을 받은 30인 참주정이 세워지면서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열리기 2년 전, 30인 참주 독재의 끔찍한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테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 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반역의 주역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와 가까운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를 배신했던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정의 지도자였고 쿠데타의 주범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유한 귀족 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장통에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엘리트인 자신들과 똑같이 대접받는 민주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청년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미친 소크라테스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항한 투사’였다.

플라톤의 저작 ‘변명’의 주제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묘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평소 대화에서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자들의 통치(중우(衆愚)정치)로 깎아내리곤 했다. 그는 민주정이 당파 간의 끝없는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며, 인기에 영합해 선출된 정치가들의 무지와 무능함이 아테네를 망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플라톤은 민주정에서는 어리석은 대중의 선택에 의해 통치자들이 선출되기 때문에 통치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정치적 무능함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민주주의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플라톤의 저작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란 병든 아이를 설득하는 요리사와 같다’고 말하고 병든 아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병든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의사이다. 그런데 의사는 맛있는 음식을 주지도 않고 때로는 굶기거나 괴로운 절제 수술을 하기도 한다. 요리사는 맛난 음식과 사탕을 준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의사를 싫어하고 요리사를 택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점에서 군중 주도의 민주주의란 이처럼 바보 같은 선택이 존중받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란 뛰어난 사람이나 덜떨어진 사람이나 똑같이 한 표를 행사하는 이상한 제도라는 것이다.더욱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스파르타의 일사불란함과 질서를 은근히 찬양하기까지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자연히 참주정을 세우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도 체계적인 교육으로 절제와 금욕을 익힌 시민을 길러내는 스파르타를 ‘개혁의 모범 답안’으로 보게 된다.

플라톤의 중심 생각은 다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따르는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탁월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더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가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계급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 모델로 제시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소크라테스의 재판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새롭게 꽃피우게 된 민주정의 실력자들이 볼 때 민주정을 비판하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이 늙은 철학자의 입을 막고 싶어 했고, 그가 입만 다물어 준다면 그의 생명을 빼앗을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재판한 아테네 시민 법정의 재판관들은 시민 다수가 판결에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필요성 때문에 제비뽑기로 추첨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명백히 법 전문가가 아니었을 뿐더러 일부는 참가 수당 때문에 이 직책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하여튼 추첨된 501명의 시민 재판관들은 280 대 221로 소크라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고, 형량에 관한 두 번째 표결에서는 더욱 압도적인 표차인 360 대 140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찬사를 받는 아테네의 민주정치에 의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한 것이다. 즉, 아테네의 우매한 지도자들이 다수결의 원칙을 이용하여 스승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현자를 살해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 같은 비판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미리 꿰뚫어 보는 듯해 위대한 철학자의 깊이를 더욱 느끼게 한다.

〈심화학습〉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참고하여 민주정치가 중우정치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지 토론해 보자.

■ 왜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가?

내전-독재 거친뒤 어렵게 되찾은 민주주의

소크라테스가 공공연히 비판… 시민 미움 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한 뒤 등장한 아테네의 독재자들은 시민사회를 대량 살해와 암살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수백 년의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아테네에서 독재정권이 성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정권은 몇 달 안 되어 붕괴되었고,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회복되었다.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회복되면서 특별 사면령이 내려진다. 사면령은 경범죄를 제외하고는 과두정치와 내전 중에 있었던 정치적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명령을 반대하는 연설이 계속되었지만 시민령은 효력을 발휘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꾹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정을 공공연하게 비판해온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을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는 쉽게 조성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신성모독’과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한 것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이용된 것이었다.

■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양심수?

혐의 인정않고 억울한 죽음 선택… 조국의 악법 역설적으로 입증

만일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더라면 사형선고는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라고 당당하게 끝까지 주장함으로써 시민 재판관들의 화를 돋우었다. 또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아닌 국외추방령을 택할 수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지인들의 탈출 권유와 확실한 탈출 기회를 저버리고 독배를 마신다.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나에게 철학을 포기할 것을 명령할지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국가의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에 배치되는 입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감형과 탈출 가능성을 모두 뿌리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확신범으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당시 아테네의 법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법’임을 입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최초의 양심수인 셈이다.

조은정 LC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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