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인베이젼’

  • 입력 2007년 10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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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 개봉된 ‘인베이젼(Invasion)’은 미국 작가 잭 피니가 지은 공상과학 스릴러 소설 ‘신체 강탈자들(The Body Snatchers)’을 영화로 옮긴 것입니다.

사실, 잭 피니의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은 벌써 네 번째입니다. ‘신체강탈자의 침입’(1956년), ‘우주의 침입자’(1978년), ‘보디 에일리언’(1993년) 같은 영화들이 나온 지 오래이지요.

궁금합니다. 잭 피니의 소설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기에,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화화되고 또 영화화되는 걸까요?

알고 보면, 그의 소설 속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그 무엇이 숨어있습니다.》

[1] 스토리라인

정신과 의사인 ‘캐롤’(니콜 키드먼)은 여성 환자로부터 이상한 얘기를 전해 듣습니다. 환자의 남편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는 것이죠. 캐롤 주변에선 기이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아들인 ‘올리버’가 핼러윈 축제 때 이웃집에서 받아온 사탕 주머니에서 끈적거리는 정체불명의 물질이 발견된 것이죠.

동료 의사이자 절친한 친구인 ‘벤’(대니얼 크레이그)과 함께 진실 규명에 나선 캐롤. 그녀는 바이러스 전문가로부터 “이 물질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급속하게 전염되는 외계 바이러스이며 특히 감염자가 잠든 사이에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바꾸어 놓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괴 바이러스는 우주왕복선을 통해 지구로 침투해 온 외계 생명체였던 것이죠.

캐롤에겐 위기가 닥칩니다. 아들을 데려간 전 남편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주위 사람들은 하나 둘씩 바이러스의 포로가 됩니다. 급기야 자신도 감염되고 만 캐롤. 아들을 데리고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녀는 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눈은 점점 감겨옵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상하게도 영화는 외계생명체 자체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 바이러스에 하나 둘 감염되어 가는 우리 인간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껍데기는 그대로이지만 생각과 정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는 모습 말이지요.

영화는 신체를 강탈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걸까요? 먼저, 외계 생명체가 보여주는 특징을 정리해 볼까요?

첫째, 강력한 전염성을 가졌습니다. 감염되면 이웃은 물론, 가장 친한 동료, 전 남편,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하루아침에 ‘남’처럼 변해 버리지요.

둘째, 감염된 사람은 겉모습은 변함없이 정신만 180도 다른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그러면서 감염자들은 고유한 판단력과 사고력을 상실한 채 모두 획일화됩니다. 시체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배회하지요.

마지막 셋째, 감염자들은 감염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을 무조건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들을 마저 감염시키기 위해 집단적으로 공격합니다.

어떤가요? 이런 특징들은 단지 외계 바이러스에만 국한된, 100%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걸까요? 아닙니다. 알고 보면, 영화는 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가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통해 진짜로 중요한 뭔가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자, 추정해 봅시다. 외계 바이러스에 빗댈 만한 우리 현실 속 존재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우선 사이비 종교가 그러할 겁니다. 사이비 종교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강하게 전파될뿐더러, 한번 ‘감염’되면 자기중심을 상실한 채 교주의 명령에 따라 획일화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신도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친 듯이 나서고 말이지요.

아,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일을 휩쓸었던 나치즘(Nazism·독일 국가 사회주의)도 해당될 겁니다. 게르만족만이 인류를 이끌 최고 민족이므로 다른 열등하고 해악적인 인종(유대인)을 격리시키고 그들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도 당시 독일인들 사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죠.

195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극단적 반공주의)은 또 어떤가요.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매카시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폭탄 발언을 하면서 미국 사회가 일제히 경직되었습니다. 자유로운 생각을 펼치는 사람들마저 빨갱이로 몰아 매장시켜 버리는 사상의 광풍(狂風)이 몰아쳤지요.

그렇습니다. 영화 속 바이러스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을 세뇌시키면서 오직 민족과 국가와 같은 전체를 위해 개인은 봉사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상’, 즉 전체주의(totalitarianism)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믿음을 짓누르는 억압적인 종교, 신념, 그리고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비유인 것이죠.

‘외계 바이러스는 반드시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활동해 그들의 정신세계를 강탈한다’는 영화 속 설정은 참으로 절묘한 장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잠이 든다는 건 인간이 정신을 놓은 채 무방비 상태에 빠지는 현상에 대한 비유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이 이성적 판단과 사고를 하지 않고 남들이 떠드는 사상이나 이념에 자신을 맡겨 버린다면, 어느새 우리의 정신세계를 강탈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지요.

[3] 더 깊이 생각하기

영화는 외계 바이러스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은유하는지를 적시(摘示·지적하여 보임)하고 있습니다. 그 바이러스란 ‘인간의 폭력(violence)’이라고 말입니다.

아들을 붙잡고 있는 전(前) 시어머니의 집으로 캐롤이 들이닥치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어머니가 넋을 놓고 보고 있는 TV 뉴스가 있는데요. 이라크전쟁을 보도하는 뉴스입니다. 또 영화 초반, 캐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무심코 듣다가 탁 꺼버리는 장면이 있죠? 이때 보도된 뉴스 역시 중동에서 일어난 자살폭탄테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겁니다. 영화는 현대인을 온통 감염시켜 버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바로 폭력이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러시아 대사 ‘요리쉬’의 말마따나 “지금 세계는 문명의 이기(利器)로 오히려 위기를 맞고 있으며 전쟁과 폭력으로 더욱 얼룩져 가고 있는 것”이죠.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20세기를 혁명과 전쟁, 테러로 얼룩진 ‘폭력의 세기’라고 불렀습니다. 폭력이란 이름의 바이러스, 이것으로부터 인간이 진정 자유로워질 날은 언제일까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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