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물 무차별 노출… ‘위험한 호기심’에 내몰리고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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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경기 가평군 A중학교. 남학생 6명이 같은 반 여학생을 점심시간에 화장실에서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학생들은 ‘낯선 사람과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며 슬금슬금 피했다. 이 학생들을 수사한 경기 가평경찰서 한성일 강력팀장은 “가해 학생들은 ‘호기심에 한번 해 봤다’고 말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면서 “부모가 통곡하고 기자들이 몰려오니 그때서야 심각하다고 느끼는 눈치”라고 말했다. 이들은 방과 후 시간을 보낼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인터넷이 유일한 놀이와 여가의 수단이었다. 경찰은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즐기면서 인터넷 중독의 정도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심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1시간에 1대꼴로 있는 버스를 타야 읍으로 나갈 수 있는 곳에 살지만 온 세상을 이어 주는 인터넷을 통해 음란물을 즐길 수 있었다. 인터넷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폭력에 무감각해진다.》

청소년의 성폭력에는 자신의 행위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는 불감증이 깔려 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이 때문에 조기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충동적으로 성폭력을 반복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동네 중학생 형들과 어울리며 담배를 피웠던 중학교 1학년생 석이(가명). 집에는 학원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 집에 모여 인터넷으로 성인 음란 동영상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

지난해 8월 석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가 전학 간 정미(가명)를 친구 집으로 불러 놀다가 정미의 가슴을 만지고 팬티를 벗기는 등 성추행을 했다. 이 사실이 정미 부모를 통해 학교에 알려지자 석이는 전학을 가게 됐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꾸짖는 부모에게 석이는 “호기심에서 인터넷에서 본 대로 하고 싶었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석이를 상담한 정신과 의사는 “머릿속에 온통 성과 관련한 이미지로만 가득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김붕년 교수는 “어린이 성폭력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어떤 상처를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범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평군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 여학생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어떻게 너희들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고 애원했는데도 반성하기는커녕 “우는 여자는 딱 질색”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소년은 인터넷을 통해 왜곡된 성 지식을 얻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성적 학대를 받는 여성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성폭행을 하면 상대방이 즐거워할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윤간이나 성폭행 장면이 담긴 음란물을 보면 폭력에 대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서울 YMCA 청소년 성문화센터의 조사(청소년 1250명 대상)에 따르면 음란 매체를 접촉한 경험이 있는 남자 초등학생은 34.5%나 된다. 청소년 성범죄가 늘어날 수 있는 토양이 다져지고 있는 셈이다.

실제 경찰청이 발표한 성폭력 소년범의 연령별 통계에 따르면 14세 미만이 2004년 0.9%에서 2005년 1.5%, 2006년 2.3%로 증가하는 추세다. 18세의 경우 2004년 27.3%에서 2005년 20.2%, 2006년 19.7% 등으로 급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동 성폭력 상담센터인 해바라기아동센터(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따르면 2005년 접수된 성폭력 가해자 497명 가운데 만 7세 미만은 39명(7.8%)이었지만 2006년엔 645명 가운데 58명(9%)으로 늘었다. 소아 성폭력범도 늘고 있는 셈이다.

성폭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은 그릇된 통념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거칠게 거절하지 않으면 성폭행을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소형석 전임의는 “‘야한 옷을 입은 여자는 성폭행을 당해도 싸다’, ‘여자가 성폭력을 당할 때 싫다고 하면 거절하는 게 아니라 좋다는 뜻이다’ 등의 말을 하는 아이가 많다”면서 “음란물 등을 통해 아이들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 결과”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 성폭행범은 자신감이 없거나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약한 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군림함으로써 심리적인 결핍을 해소하려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경기도 청소년상담센터 유순덕 소장은 “요즘 아이들은 세상을 대하는 데 자신감이 없고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모른다”면서 “분노나 화가 쌓여도 인터넷 게임으로 풀려고 들며 현실 세계에서 건강하게 분노를 방출하는 데 서툴다 보니 폭력적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1월 중학생 2명이 서울 양천구의 한 아파트 16층 옥상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돌을 던져 40대 남자를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가 구급차에 실려 가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가 붙잡힌 김모(13) 군 등은 “높은 곳에서 벽돌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에 장난친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소아정신과에는 아이들의 폭력 성향 때문에 고민하는 부모들의 상담이 줄을 잇는다.

중학교 1학년 명식이(가명)는 화가 나면 집안은 물론 학교의 기물을 마구 때려 부순다. 부모나 선생님이 호되게 야단을 쳐도 그때뿐이다. 명식이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화가 나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명식이를 진단한 의사는 “나이는 14세이지만 감정조절능력은 유아기에서 멈춘 것 같다”며 “폭력을 사용하는 아이는 대개 정서가 불안하기 때문에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 양육 태도를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철희아동상담센터 신철희 소장은 “아이들이 표출하는 화의 정도는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양에 비례한다”면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는 친구나 선생님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감정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도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심지어 엄마를 때리는 아이도 있다.

중학교 2학년 광민이는 초등 5학년 때부터 화만 나면 엄마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최근 엄마의 뺨까지 때렸다. 의사는 “광민이는 항상 화가 가득 난 상태였고 의사에게도 오만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공부만 잘하면 다른 것은 그럭저럭 용서할 수 있다고 너그럽게 대한 것이 아이를 망치지나 않았는지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생은 구구단은 잘 외우면서 친구의 정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감정불감증 세대이자 정서 불소통 세대다. 삶에서 정서적 능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대지만 이를 중시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자녀의 건전한 정서 개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한 클리닉’ 한성희 소아정신과 원장은 “우리 사회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며 “사회적 패자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시선들, 나와 내 가족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적인 태도, 급격한 가정 해체 등이 아이들의 심리를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 아이 폭력 성향 고치려면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폭력적인 성향을 고치려면 부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부모가 ‘내 자식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며 바라는지’를 항상 살피려는 질(質)적인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자식과의 의사소통 장애는 해소되기 힘들다.

한양대병원 소아정신과 안동현 교수는 “아이 성장에 맞춰 부모의 역할도 조정해 나가야 한다”면서 “초등학교 3, 4년생이면 자신의 주장을 펼 나이인데도 아이가 자기에게 대든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많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정신과를 찾는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와 함께 외식도 하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는데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반면 자식은 ‘부모는 내가 진정 원하는 걸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자녀의 생각을 알아보는 수준을 넘어서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생각을 조율해 나가야 자녀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참을성을 갖고 아이의 말을 충분히 들어야 한다. 또 아이의 말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인터넷 등을 타고 쏟아지는 음란물도 부모의 골칫거리다. 아이가 음란물을 본다는 걸 안 부모는 대개 충격을 받을 뿐 대처법을 몰라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아하! 청소년성문화센터’의 김미옥 상담지원팀장은 “자녀가 성문화에 노출되더라도 이를 건강하게 소화할 수 있도록 시각을 높이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녀가 음란물을 보고 있을 때 심하게 꾸중하지 말고 자녀가 그만큼 자랐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또 ‘나도 어릴 때 이런 호기심이 있었다’, ‘나도 부모 몰래 음란물을 보다 들킨 적이 있다’는 등의 말로 동감을 표시해야 자녀가 마음을 열게 된다. 부모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남의 몸도 사랑해야 하므로 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걸 알려 주고 자녀가 올바른 성 지식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학교의 역할도 중요하다. 실제로 성폭력이 있으면 △피해자가 어떤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지 △임신, 낙태 등 성폭력으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등을 가르치고 다양한 영상물과 역할극 등을 통해 학생에게 성폭력의 위험성을 알려야 한다.

김 팀장은 “성폭력 가해자는 처음엔 재수가 없어 붙잡혔다고 억울해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피해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느끼는 순간 다른 사람도 자신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가해자 청소년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는 별문제가 없다며 사태를 축소하거나 부인하려 드는 것도 문제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아들이 성폭행을 저질러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사내가 그럴 수도 있다’고 두둔하는 아버지도 있다”며 “자녀 상태의 심각성을 인정하고 진지하게 치료법을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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