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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4월 27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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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애국심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의 독도 권리 주장을 침략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로 규정했다. 결연한 표정으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광복과 독립까지 거론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며 애국지사를 떠올린 TV 시청자도 있었을 것이다.
특별담화문에 담긴 대통령의 주장은 ‘지당한 말씀’이다. 국내 반응은 물어보나 마나, 지지하는 국민이 많을 게 분명하다. 애국심에 호소하면 없던 힘도 나온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참가한 프로야구 선수들이 우리보다 훨씬 강한 일본을 두 번이나 이긴 비결이 바로 애국심 아닌가.
이번에는 농심(農心)이다. 경기 평택시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에서는 ‘봄이 왔으니 내 땅에 씨를 뿌리겠다’는 농민들의 마음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과 외지인인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을 꽁꽁 묶는 농심의 힘은 애국심에 못지않다. 중장비와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한 국방부의 대대적인 농수로 봉쇄작전은 하룻밤 새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맺히듯 인간들의 봄맞이 경연도 뭔가 결실을 남길 수 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국심과 농심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노 대통령의 담화로 확실해진 것은 더욱 멀어진 한국과 일본의 거리다. 한일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먼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한국의 공세를 일본은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지방선거를 앞둔 국내용’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을 하는 게 좋다며 동문서답을 하더니 “대화 거부를 후회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말로 속내를 드러냈다.
노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에 미달하는 외교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됐으니 양국 외교 당국자들이 만나기도 어려워졌다. ‘조용한 외교’가 사라진 무대를 향해 ‘조용한 결별’이 다가오는 것 같다.
농심의 사이 벌리기도 만만찮다. 정부와 대결하고 있는 평택 시위대의 궁극적 대상은 미국이다. 충돌이 심해질수록 반미감정 또한 커지게 된다. 농민들은 농심에 충실할지 모르지만 원정 시위대의 목표는 그렇게 소박하지 않을 것이다. 현 정부 출범 후 끊임없이 삐걱거린 한미 관계가 평택에서 결정적으로 틀어질 수도 있다.
이 봄에 만나는 세 번째 감정은 측은지심. ‘인도적 지원’이라는 좋은 명분으로 행해지는 북한에 대한 마음 씀씀이다.
남북회담이 여러 차례 열렸지만 결과를 빨래 짜듯 압축하면 언제나 ‘북에 뭔가 주고 약간의 양보 얻어내기’가 남는다. 평양에서 열린 18차 장관급회담의 결과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은 남한이 북한에 비료 20만 t을 주기로 한 것뿐이다. 나머지는 ‘협력하기로 했다’ ‘실현해 나가기로 했다’ ‘추진하기로 했다’는 미래형 합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굶주리는 동포가 불쌍하고 측은해서, 매정하게 따지지 않고 도와주자는 자세 때문이다. 북이 변하지 않아도, 약속을 어겨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감정은 감정에 머물러야 한다. 애국심과 농심이 외교 문제를 푸는 데 걸림돌이 되듯 측은지심으론 남북 간 현안을 해결하기 어렵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하지 않았는가.
정부의 북한 편애는 당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사방이 꽉꽉 막히자 북한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옹색한 노릇이다. 국익이 얽히고설키는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유일한 숨구멍으로 삼는 건 단견이다. 일본과 미국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북한에 쏟은 만큼의 인내와 성의를 보여 주는 게 옳다. 6자회담을 계속하자면서 두 나라와 멀어지려 하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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