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최종길교수 유족에 18억원 배상하라”

  • 입력 2006년 2월 1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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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최종길(崔鍾吉)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유족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한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민법상 '신의칙(信義則·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될 경우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서울고법 민사5부(부장판사 조용호·趙龍鎬)는 14일 최 전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국가는 최 교수 유족에게 18억48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칙적으로 이 사건에서 유족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시효가 완성돼 소멸됐지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유족들은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그 기간에 시효가 완성됐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와 같은 거대 국가조직이 서류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고 밝혔다.

▽'신의칙' 판결=재판부는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기 위해 신의칙의 법리를 적용했다. 신의칙이란 서로 상대방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 원칙.

보통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인권침해 사건에서 국가는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신의칙상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를 지므로 국가가 그 신의를 배신한 이상 그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은 지난해 대법원장 국회 인사청문회 당시 "국가권력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할 국가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라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다른 의문사 사건에서도 배상 가능한지는 논란=이번 판결로 군 의문사나 삼청교육대 폭행치사 등 다른 의문사 사건에서 그대로 적용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삼청교육대 사상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1996년 "대통령이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게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특별담화를 발표한 것은 정치적으로 국민의 이해를 구한 것에 불과하므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 권리남용에 해당된다고 할 수는 없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한 고법 판결을 파기했다.

따라서 다른 사건에 최 전 교수 판결의 법리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의 부당성을 직접 인정한 것이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비슷한 사건에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최 전 교수 유족과 국가 양측 모두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재판부는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최 전 교수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 차모 씨에 대해 1심대로 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정효진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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