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바꾸자” 법원 몰려간 ‘삼순이’

입력 2005-11-24 03:02수정 2009-09-30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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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자신의 이름을 쉽게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법원 판결내용이 23일자 본보 보도로 알려지자 신청자가 늘기 시작했다. 23일 서울가정법원을 찾은 시민들이 개명신청 서류를 접수시키고 있다. 이종승 기자
23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가정법원 1층 민원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개명신청 접수창구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의 손에는 동아일보 23일자 신문이 들려 있었다. 그는 개명에 관한 대법원 결정을 보도한 ‘삼순이 이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법원을 찾은 것. ▶본보 23일자 A1·3면 참조

노인의 이름은 최O랑(崔O郞·63)이라는 일본식 이름. 그는 “이제라도 일본식 이름을 바꾸고 여생을 살고 싶다”며 개명신청 절차를 물었다. 최 씨의 사례는 ‘이름은 인격의 상징이며 이름에 대한 권리는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결정문의 의미를 실감하게 한다.

서울가정법원에서 개명 신청 접수업무를 담당하는 고모(여) 계장은 “개명 신청은 하루 평균 15건 정도가 들어오는데 오늘은 훨씬 많았다”며 “앞으로 엄청나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본보가 대법원 결정에 따라 개명 허가가 이전보다 훨씬 쉽게 이뤄질 것이라고 보도한 뒤 법원의 민원 창구 직원들도 하루 종일 전화 문의에 ‘홍역’을 치렀다.

서울가정법원에서 민원업무를 담당하는 김모 계장은 “왜 이렇게 아침부터 전화가 많이 오나 했는데 민원인들이 신문기사 이야기를 꺼냈다”고 말했다.

민원 창구의 또 다른 직원은 “오전에 중년 여성 한 사람이 전화를 해서 신문기사 이야기와 함께 ‘한 번 개명 신청이 기각됐는데 또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며 “개명신청이 이미 기각된 적이 있다고 해도 다시 신청할 수 있다고 설명해 줬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 민원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에는 개명신청 이유 중에 ‘팔자를 바꿔보고 싶다’는 이유가 많아졌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 같다’ ‘회사가 잘 될 것 같다’ ‘이혼 뒤 꾸리는 새 삶이 더 행복해질 것 같다’는 등의 개인적인 내용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결정내린 대법관도 ‘동병상련’

‘이름에 대한 권리는 헌법상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해당하므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며 개명(改名) 허가 기준을 새롭게 세운 이강국(李康國) 대법관 스스로가 이름 때문에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법관은 문제가 됐던 구모(35) 씨의 개명 신청 재항고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었다.

법원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대법관의 이름은 이 대법관의 할아버지가 항렬(강·康)에 따라 지은 것. 문제는 이 대법관이 1972년 대전지법 판사로 임관하면서 생겼다고 한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총책 박헌영(朴憲永)의 심복이자 여간첩으로 알려진 김수임의 연인이었던 남로당 간부 이강국(李康國·1955년 사형)과 이름이 똑같았기 때문. 당시 법원행정처장과 지법원장은 “당신이 판결하면 주민들이 빨갱이가 판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니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권유했다. 박헌영의 고향인 충남 예산 주민들은 “남로당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초를 당했는지 아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법관은 실제로 ‘이강만’ 등 2, 3개의 이름을 골라 개명할까 고민했으나 6촌 이내 친척 가운데 똑같은 이름이 있어 결국 포기했다.

그는 후배 법관들에게 이런 일화를 소개하며 “나이가 들어 내 이름에 애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대법관의 이름은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인데 결과적으로 자신처럼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 셈이 됐다.

‘개명’에 성공한 유명인들도 적지 않다.

문희상(文喜相) 열린우리당 의원의 원래 이름은 ‘문정흥’이었다. 군 복무 때까지도 ‘정흥’이었는데, 1973년 경기 의정부에 서점을 열면서 작명가에게 “돈 잘 버는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해 ‘희상(喜相)’ 두 글자를 받았다고 한다.

홍준표(洪準杓) 한나라당 의원의 본래 이름은 ‘홍판표’였다. 그런데 1985년 청주지검 검사로 임관한 뒤 알고 지내던 청주지법원장이 “왜 검사가 판사(判事)의 판(判)자를 쓰느냐”며 개명을 권했고, 준(準) 자로 고치는 걸 직접 허가해 줬다고 한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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