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고령 가야 고분 발견

  • 입력 2005년 9월 24일 03시 07분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야 역사 연구는 불모지였다. 절대적인 사료 부족 때문이었다. 가야가 위치했던 경상도 땅속 어딘가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오길 고대하는 고고학자가 적지 않았다.

1978년 9월 24일 약 1500년 전 대가야의 땅 경북 고령군에서 그 갈망은 현실로 이뤄졌다. 고령군 지산동의 대가야 고분군 32호분(5세기경)에서 찬란한 금동관이 대구 계명대 발굴단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환두대도(環頭大刀·손잡이 끝이 둥근 고리로 장식된 큰 칼)와 각종 토기, 장신구도 나왔다.

금동관도 금동관이지만 당시 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은 2개의 인골(人骨)이었다. 순장(殉葬)된 사람의 뼈였기 때문이다. 한 해 전 지산동 44, 45호분에서 국내 최초로 순장 인골이 나온 데 이은 발굴이었다. 이로써 ‘가야는 순장의 나라’였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순장은 대개 지위가 높은 권력자들이 죽었을 때 노예나 하인, 신하 등을 함께 묻었던 고대 사회의 장례 풍습이다. 이 순장제도는 당시 전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였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순장의 흔적은 가야와 신라 땅이었던 경상도에서만 발견되었다.

그럼 순장당한 사람들은 모두 지위가 낮은 하인이었을까. 아니다. 고령군 지산동 고분에선 칼을 차고 순장된 사람도 발견됐다. 당시 칼을 찼다는 것은 귀족이거나 지위가 높은 무사였음을 의미한다. 시녀와 노예 등 신분이 낮은 사람뿐만 아니라 왕을 호위하던 귀족이나 무사, 무덤 주인공의 부인이나 사랑하던 여인들도 함께 순장된 것이다.

순장할 때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을 매장했을까, 아니면 죽여서 매장했을까. 신분이 낮은 하인들은 강제로 죽여 순장했을 가능성이 높고 비교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순장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다. 이 같은 사실은 발굴 당시 순장 인골의 상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장자의 두개골에 둔기로 맞은 외상이 있거나, 순장자의 두개골과 몸체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는 죽임을 당한 채 순장됐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가야의 순장은 끔찍한 일이다. 당시 사람에겐 어떠했을까? 생전에 모셨던 사람을 죽어서도 모셔야 한다는 당시의 문화와 종교가 죽음의 공포마저 잠재울 수 있었을까?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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