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씨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 전문

  • 입력 2005년 4월 14일 14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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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지씨가 홈페이지에 올린 글.

2005.4.12. 밤 9시 뉴스에 "위안부 할머니는 북한공작원"이라는 뉴스가 나왔고, 익일 아침 신문에도 같은 내용들이 보도됐다. 이를 본 가족이 욕을 했다. "일본 놈들,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UN 상임이사국에서 떨어지지!"

일본은 1910년 한국을 합방했다. 그로부터 32년 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 함으로서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32년동안에는 위안부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32년간에는 왜 위안부문제가 없었는가?

중국, 인도,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유럽강국들과 일본의 식민지가 됐었다. 선의였느냐, 악의였느냐에 대해 따지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결과만을 가지고 본다면 한국은 다른 여타의 식민지들보다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일본은 조선 여인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가졌던 나라들은 흑인을 노예로 잡아다가 아들 딸 부모를 떼어서 팔았고, 소나 말처럼 채찍으로 때려가면서 부렸다. 인도와 중국은 아편쟁이들이 되었다. 이처럼 여타의 식민지들은 착취와 약탈의 대상이었지만, 한국만은 일본인이 건너와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던 땅이라 애착을 가지고 가꾸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한국에는 지진도 없고, 산수가 수려하고,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국을 일본만큼 가꾸고 한국인들 역시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내선일체)를 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을 사범학교에 보냈고, 졸업을 하면 한국에 있는 학교에 배치했다. 한국에 일본인 전용학교들, 한국인 전용학교들을 세웠으며 도로, 철로, 항만, 발전, 공장, 건물 등 많은 자본을 투자했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다른 여타의 식민지들은 착취의 대상이었지만 한국만큼은 가꿈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그 시대를 아는 분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는 당시의 경제를 연구한 젊은 학자들에게도 형성돼 있는 견해인 듯 하다.

여성에 대한 대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역사는 침략 받고 고통 받은 역사들로 채워져 있다. 900여회의 침략을 당했고, 대부분의 침략을 중국으로부터 당했다. 중국이 우리를 침략하면 예외 없이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여성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나이가 들면 퇴물이라며 버렸다. 버림 받은 한 많은 여인들이 그래도 내 땅이라고 조선을 찾으면 조선인들은 이들을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원래는 '환향녀'라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처럼 한국여성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한다.

위안부의 종류

"위안부", "정신대"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인들은 흥분부터 한다. 지난 번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는 양 색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가 혼이 났고, 지금도 많이 시달리는 모양이다. 그의 글 역시 거두절미한 언론의 희생물이었다. 여배우 이승연이 위안부 역할을 하느라 누드 사진을 찍었다해서 벼락 맞듯이 당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라면 아예 손사래를 치며 멀리 하려 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예전의 5.18처럼 금단의 구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금단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곳일수록 문제가 많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위안부에는 엄격히 3가지로 구분돼 있지만 필자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를 구별하지 못해 왔다.

(1) "일본군위안부": 일본인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일본에 반항하던 집안의 규수들, 시집을 미처 가지 않은 규수들이다. 밥을 짓다가, 김을 매다가, 빨래를 하다가 또는 학급에서 공부를 하다가 잡혀간 규수들이다. 이 여인들이야 말로 가장 억울하게 잡혀가 일본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한 여인들이며, 그래서 일본을 증오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쳐 있다. 일본의 통계나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위안부"는 20%, "종군위안부"는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부대 주변에는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일본 창녀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 여성들은 돈도 받지 못하면서 성을 제공했다.

(2) "종군위안부": 이들은 살림이 극히 어려워 스스로 군표를 받고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창녀라 한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했던 말은 바로 이런 측면을 말한 듯 하다.

(3) "정신대"(挺身隊): 이는 '여자근로정신대'의 준말로, 15-40대에 이르는 근로여성으로 돈을 받고 간호사, 군수공장 등에서 일한 여성들이다. 끝까지 정조를 지킨 사람, 때에 따라 몸을 팔기도 한 사람, 또는 '종군위안부'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 세 부류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일본군위안부"들이다.

일본군위안부는 지금 몇 살인가?

1944년이 아마도 마지막 "일본군위안부"가 끌려갔던 때일 것이다. 당시에 15세 이상의 여성이었다면 지금은 최소한78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일본군인들에게 5-6년간 몸을 바치게 했다면 78세 이상의 고령에다 몸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게 진짜 할머니의 증언이다. 진짜 위안부 할머니들은 정신적 고통과 성병 및 기타 질병으로 건강이 너무 상해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TV에서 보여 지는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연세가 그렇게까지는 많아 보이지도 않고, 건강도 매우 좋아 보이며, 목소리에도 활기가 차 있는 분들이 있다.

한승조 교수가 쓴 위안부(정론지)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인 여성이 挺身隊(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적인 위안물로 이용되었다 하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는 모습은 일본을 나락에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자신들이 먼저 떨어지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 . . 일본이 한국여성을 전쟁 중에 그렇게 이용했다는 것도 전쟁 중의 일시적이면서도 예외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런 정책의 희생자가 수천, 수만 명이 된다면 六何原則에 따르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어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많았던 수도 아니었는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과장된 사실을 믿게 해줄 만한 명백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그나마 이미 받은 것 이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 십 년 동안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그런데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어쩌자고 이런 노파들의 행동이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만들고 열심이 보도해 대는 것인지. 애초에 性의 문제는 돈으로 환산될 수가 없는 것인데 왜 돈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는 것인지? 이런 치사하고 못난 짓은 하면서 어떻게 위대한 민족임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6하 원칙에 의해 인정받은 "일본군위안부"는 누구누구인가?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6하 윈칙에 따라 확실한 "일본군위안부"였다고 인정받은 할머니가 있다. 현재 82세다. 이 할머니가 인정하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는 33명이며, 이들 중에는 일본대사관에 나가 시위를 하는 할머니가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위안부였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그 진위 여부를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요사이 TV에 자주 나오는 할머니의 경우에는 일본 유관단체가 "가짜"라며 보상금 지불 마저 거절한 바 있다 한다. 일본 기자 4명에게 인터뷰를 했는데 네 번 다 말이 틀리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은 196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병사들은 지금 60세 전후가 됐다. 고엽제 등 보상 받을 일이 생기면 "내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 증명하는 방법은 월남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이 없으면 당시의 지휘관들과 동료들을 찾아 증언을 하는 것이다.

1980년 광주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누가 민주화투사였느냐, 누가 시위에서 피해를 입었느냐를 조사하는 데에도 별 희한한 속임수들이 많았다. 서로가 서로를 증언해주는 일들도 허다했다. 당시에는 주유소에 가면 휘발유 통을 마구 주었다 한다. 용달차 운전자가 휘발유를 드럼 채 얻어가는 재미에 3차례나 드럼통을 가득 실어 집으로 날랐다. 4번째 가다가 총을 맞았는데 민주화투사로 보상을 받는다 한다. 이는 광주 교도소에서 들은 말이다. 이런 유의 잡다한 사례들은 광주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런데! 60여년이 지난 지금 가짜 위안부로부터 "진짜 일본군위안부"를 가려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대개는 "노인이 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한 건 사실이다"라며 우기는 경우가 많다 한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낮 12:00-13:00까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3명에서 많게는 6명 정도의 할머니들이 가슴 앞에 노란 색 천을 두르고 시위를 한다. "진상을 규명하라" "사죄하라" "배상하라" "역사교과서에 진실을 실어라" "전범자를 처벌하라". 벌써 600여회를 훨씬 넘겼다 한다.

진짜 "일본군위안부"나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창피해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후미진 곳에 산다고 한다. 일본 법정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증명된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진짜 할머니들은 TV에 얼굴 찍히기를 싫어하여 단 한번도 노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최근 TV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할머니들 중에는 중국에서 온 5명 정도의 할머니들도 있다한다. 이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 나오는 대가로 하루에 몇 만원씩의 일당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할머니들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수용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로 알려진 33명의 할머니들은 나눔의집이 싫다며 나와서 산다고 한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에 구애됨 없이 보상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위 3개 카테고리 중에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분명히 구분하여 보상을 청구하면 받아주겠다고 한다. 모두가 "일본군위안부"라는 가장 유리한 카테고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한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라고 서로 믿는 할머니 수는 33인이며, 이들은 "세계평화 무궁화회 33인회"를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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