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5주년]우린 왜 古典을 읽는가

  • 입력 2005년 3월 31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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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지는 여백 깊어지는 사색원전 강독 모임의 한 회원이 책의 여백에 모르는 단어의 뜻풀이를 촘촘하게 적어 넣고 있다.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이들의 고전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고전 읽기 모임은 지나온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전영한 기자
채워지는 여백 깊어지는 사색
원전 강독 모임의 한 회원이 책의 여백에 모르는 단어의 뜻풀이를 촘촘하게 적어 넣고 있다. 나이와 세대를 초월한 이들의 고전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고전 읽기 모임은 지나온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전영한 기자
지난달 19일 오후 2시 반,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은정희(66·여) 전 서울교대 교수의 집 2층 서재에 학인(學人) 8명이 모였다. 기다란 책상에 마주앉은 이들은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을 펼쳤다.

격주로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이 고전 강독 모임은 1983년 은 전 교수와 허경일(79·여) 전 덕성여대 사학과 교수, 신용호(66) 공주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이강수(65)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한 10명으로 시작됐다. 고전 원전을 읽어내는 실력이 부족하고 원전을 소홀히 하는 당시 학계의 세태를 반성하면서 제대로 원전 공부를 해보자는 뜻에서였다.

올해로 23년째를 맞는 이 모임에서는 안효식(80·여) 전 배화여고 교장, 동의보감을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한 허봉희(73) 여사 등 노장들과 초등학교 교사인 권선향(26·여) 씨, 중국불교에 대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박인석(33) 씨 등 소장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고전을 읽고 있다. 건국대 강의전담 교수 박소정(37·여) 씨와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완역했던 최제숙(75·여) 씨는 이날 사정이 있어 결석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주역(周易)’ ‘장자(莊子)’ ‘시경(詩經)’ ‘서경(書經)’이다. 주석까지 꼼꼼히 읽다보니 책 한 권을 읽어내는 데 대개 3∼4년이 걸린다. 이날 읽은 ‘예기’도 강독을 시작한 지 3년째 접어들었지만 아직 절반도 못 읽었다. 그러나 이미 다음에 읽을 책을 ‘사기열전’으로 정해두었다. 언제 시작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다.

“여기 모인 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도반(道伴)입니다. 도반들과 고전을 읽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이 시간이 제게는 가장 즐거운 때입니다. 진실이 담겨 있지요.”

노장-소장 호흡 맞춰
지난달 19일 은정희 전 서울교대 교수의 집에서 열린 원전 강독 모임. 20대부터 80대까지, 노장과 소장 모두 고전의 깊은 맛에 푹 빠졌다. 전영한 기자

최근 ‘논어’ ‘장자’ 등을 역주해 펴낸 이강수 교수의 모임 예찬이다.

지금도 영어판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일본의 월간 평론지 ‘주오고론(中央公論)’ 등을 읽는다는 안효식 전 배화여고 교장은 “일제강점기 대학에서 모두 서양식 학문을 공부했고, 그것이 내 교양의 근간이었는데 여기서 동양고전들을 읽으면서 동양학이 서양학에 비해 훨씬 더 깊고 풍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20대 권선향 씨와 30대 박인석 씨는 읽는 즐거움도 크지만 책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에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권 씨는 “이분들의 모습에서 공부하는 게 곧 노는 것이고, 노는 것이 곧 공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고전을 읽고 그 뜻을 새기는 나이를 초월한 열정에 3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讀書百遍意自見’ 지금도 통하더이다▼

“백 번만 읽어라. 그래도 안 되면? 이백 번 읽어야지∼.”

늘 높은 벽으로만 느껴지던 한문을 ‘정복’하겠다며 찾아간 지곡서당(芝谷書堂·한림대 부설 태동고전연구소·경기 남양주시 수동면)의 첫 수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1914∼1999) 선생은 ‘장난기’ 그득한 눈빛으로 신입생들을 바라보시며 빙긋이 웃고 계셨다.

반복된 글 읽기를 통해 한문을 익히는 것은 수천 년 내려온 전통적 학습방법. 그것은 내가 지곡서당에서 공부하던 1990년대 초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고수되고 있는 ‘검증된’ 공부방식이다.

첫 수업이 끝나자 숙제가 주어졌다. 그날 배운 ‘논어’의 첫 장을 다음 시간까지 암송하는 일이었다. 진도가 빠른 사람은 열 번 정도 읽으면 암송을 했지만, 대부분은 오십 번쯤 읽어야 암송이 가능했다. 백 번만 읽으면 누구나 암송할 수 있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암송하기에 급급해서 고전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반복적 글 읽기의 효과는 읽을수록 나타났다. 50번, 60번을 읽어가면서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백 번 읽으면 글의 뜻이 저절로 드러난다)’이란 말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한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한문 공부 3년이면 누구나 주자학 신봉자가 된다’는 것이다. 방대하고 난해한 동양고전에 대해 주희(朱熹·1130∼1200)의 주석만큼 논리적이고 명쾌한 해설을 찾기 어렵고, 그래서 점점 더 주희의 주석에 의존해서 해석을 하다보면 저절로 주자교(朱子敎) ‘신도’가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비판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피해야 할 길이지만, 거대한 주자학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해결책은 바로 ‘독서백편의자현’에 있다. 읽는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글의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되새겨 볼 수 있고, 저자가 고심 끝에 선택했을 단어와 문장 형식의 미묘한 어감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글을 쓸 당시 저자가 이르렀던 고도의 정신적 ‘경지’에 내가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 ‘주희’는 그 ‘경지’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다리’였지만, 점차 그 경지로의 접근을 가로막는 ‘벽’으로 느껴졌다. 주희를 넘고,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서 이루어지는 저자와의 교감(交感)! 그것은 해설서를 통해 쉽게 공부하는 데 익숙했던 과거에는 맛보지 못한 ‘지적 희열’이었다.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모든 글을 꼼꼼히 정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읽어야 할 글들이 있다. 바로 ‘고전’이다. 저자가 이르렀던 정신적 경지와 정서적 감동을 직접 만나는 기쁨은 반복과 집중의 글 읽기가 아니고는 결코 체감할 수 없다.

김형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kphilo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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