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근로자 ‘하반신마비病’ 3년전 안산서도 발병

  • 입력 2005년 1월 14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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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을 수 있을까”경기 화성시의 한 LCD부품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유기용제에 중독돼 하반신이 마비된 태국 여성 노동자 왈란 폰 씨(33)가 안산시 안산중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안산=변영욱 기자
“다시 걸을 수 있을까”
경기 화성시의 한 LCD부품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유기용제에 중독돼 하반신이 마비된 태국 여성 노동자 왈란 폰 씨(33)가 안산시 안산중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안산=변영욱 기자
경기 화성시에 이어 안산시 반월공단의 액정표시장치(LCD) 부품 회사에서 근무하던 외국인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다발성 신경병증(팔다리 신경마비를 가져오는 병)을 일으켜 이들 중 일부는 2년 7개월째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역시 LCD 부품을 최종 세척하는 과정에서 마스크 등 안전장비를 갖추지 않아 ‘노멀헥산’ 성분이 들어 있는 세척제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잇따르는 피해사례=14일 고려대 안산병원에 따르면 안산시 반월공단 LCD 부품제조업체인 S 사(폐업)에서 근무하던 양조국 씨(40)와 여수운(53) 임아얀 씨(47) 등 중국인 여성 노동자 6명이 2002년 6월 집단으로 이 병에 걸렸다.

이들은 팔다리에 부분마비 증세를 보여 이 병원에서 신경조직 검사 등을 받은 결과 노멀헥산 중독으로 인한 다발성 신경장애로 판정받았다.

이들 중 양 씨 등 3명은 이 병원과 안산중앙병원 등에서 2003년 5월까지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았으며 퇴원 후에도 부정기적으로 통원치료를 받았고 최근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양 씨 등이 일했던 S 사는 LCD 모니터를 생산하는 업체로 이들은 2∼6개월간 밀폐된 공간에서 생산한 LCD 부품을 노멀헥산 성분의 세척제로 닦는 작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화성시의 D 사에서 근무하다 다발성 신경장애에 걸린 파타라완 씨(30) 등 태국인 여성 노동자 5명은 안산중앙병원에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이들도 밀폐된 검사실에서 길게는 하루에 15시간씩 마스크나 장갑, 안경 등 보호장비 없이 7개월∼3년 동안 유기용제로 제품을 세척하는 작업을 해오다 하반신 부분마비 등의 증상을 보였다.

취재팀의 확인 결과 이 밖에도 1999년 H 타이어 근로자 1명과 2002년 경기 부천시 D 화학 근로자 1명이 노멀헥산에 중독돼 한국산업안전공단에 보고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산업안전공단 직업병연구센터 김병규 차장은 “이들은 모두 내국인으로 입원 치료를 받고 완쾌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외국인들의 경우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보고된 것이나 역학조사 요청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안전사각지대의 외국인 노동자들=화성시 D 사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태국인 여성 노동자 5명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특수건강진단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14일 밝혀졌다.

노동부는 “사업주가 불법체류자 고용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검진을 회피한 것인지, 근로자가 스스로 검진을 거부한 것인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현행 규정상 유해물질(총 120종)을 다루는 사업장의 근로자들은 물질의 독성 정도에 따라 6개월∼2년에 한 번씩 특수건강진단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어길 경우의 처벌은 1인당 과태료 20만 원에 불과하고 더구나 불법체류자들은 의무 검진대상이 아니다.

고려대 안산병원 박종태 산업의학과장은 “불법체류 외국인들은 정기검진 대상이 되지 않아 이런 피해사례가 재발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 대표 김해성(金海性) 목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9년째이고, 외국인 노동자 인권유린에 온 사회가 경악했던 게 10년쯤 된 일인데 여전히 상당수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마치 ‘현대판 노예’처럼 위험 속에 방치돼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 목사는 “더구나 기존의 외국인 노동자 산업재해가 단순 사고성 외상이었던 데 비해 이제 중독성 직업병마저 불거지고 있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 노동부는 이들과 같은 증상을 보인 후 지난해 12월 태국으로 귀국한 노동자 3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치료를 받게 할 방침이다.

▽불법체류 외국인들도 산재처리 가능=이번에 다발성 신경장애가 발병한 태국인 노동자는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불법체류자다. 중국인 노동자 역시 당시 신분은 모두 불법체류자였다. 그러나 국내법은 불법체류자라 해도 작업장 소속 근로자이고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면 산재로 처리되고 통상 치료기간에는 추방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안산=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안산=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노멀헥산이란▼

“공업용 세척제나 타이어 접착제의 소재로 쓰이는 화학물질. 다발성 신경장애를 유발하는 주요 화학물질로서 관리대상 유해물질로 분류돼 있다. 전자부품 세척에 주로 사용된다. 1999년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사용 작업장은 전국 367곳으로 근로자 수는 2600여 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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