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법정 증거능력’ 재검토

  • 입력 2004년 9월 9일 18시 24분


절도 피의자 A씨는 검찰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자백했다. 검찰은 이 자백을 조서에 담아 A씨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A씨는 조서 마지막 부분에 이름을 쓰고 손도장도 찍었다.

A씨는 기소돼 법정에 섰다.

하지만 피고인 A씨는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은 “A씨가 다 자백했다”며 A씨가 직접 서명 날인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들이댔다.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A씨는 “조서 내용은 검사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이며 내가 스스로 한 말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검사가 “당신이 서명 날인하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A씨는 “서명 날인은 내 것이 맞지만 조서 내용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백의 진위를 놓고 검사와 피고인이 첨예하게 맞설 경우 누가 유리할까.

현행 형사재판절차에서는 검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형사소송법 312조 1항과 이 조항에 대한 대법원 판례 때문이다. 대법원은 피의자가 검찰 조서에 서명 날인한 것이 사실로 인정되면, 강요나 고문에 의한 것이 아닌 한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정하더라도 조서 내용은 그대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한다. 즉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이 같은 관행과 판례에 대해 재점검하겠다고 나섰다. 대법원은 16일 오후 2시 대법정에서 검사가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가 쟁점이 된 형사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실시한다고 9일 밝혔다. 대법원이 형사사건에 대해 공개변론을 여는 것은 처음이다.

▽사건 개요=위의 A씨 사례는 가상의 예다. 16일 공개변론 대상이 된 ‘진짜 사건’은 교통사고를 당한 피고인 주모씨 등이 병원장 최모씨와 공모해 교통사고로 인해 노동력을 상실한 것처럼 속여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탔다는 것.

1, 2심 법원은 주씨와 최씨 등이 법정에서 혐의사실을 부인했는데도 검찰 조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인정했던 최씨의 신문조서와 보험회사 직원 오모씨의 진술조서 등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주씨 등의 변호인은 “주씨 등이 검찰에서 했던 진술 내용과 다르게 조서가 작성됐다”고 주장하며 조서의 증거능력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상고 이유서를 대법원에 냈다.

이 같은 주장은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규정한 형사소송법 312조 1항과 관련된 기존의 대법원 판례와 다른 것.

이번 공개변론은 기존 판례를 재점검하자는 취지다. 대법원은 공개변론에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에 대한 변호인과 검찰의 주장을 들은 뒤 최종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전망과 파장=구체적인 사건을 놓고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공개변론까지 연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판례가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고 법조계에서는 전망한다. 전원합의체는 통상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구성된다.

기존 관행에 대해 학계에서는 “자백 의존 수사를 양산한다”며 비판해 왔다. 판사들도 검사가 제출하는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와 진술을 중심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해 왔다.

만약 대법원이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면 ‘형사재판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과 다름없다. 자백 위주의 수사관행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재판의 근본 형태도 공판중심주의로 바뀔 수밖에 없다.

검찰의 반발은 거세다. 서울중앙지검의 특수부 검사는 “지금도 뇌물수수나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정치인들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해 무죄판결을 받는 사례가 있는데 기존 판례까지 변경되면 이 같은 사례가 홍수를 이룰 것”이라며 “앞으로 뇌물수사는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고 말했다.

검사가 법관에게 절대적으로 예속되는 ‘법원 패권주의’의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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