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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20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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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저편 조교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망연자실. 달리던 차를 세우니 빛나는 신록을 배경으로 모를 심고 있는 농부들이 멀리 보였다. 문득 선생님의 아호 운인(芸人)이 떠올랐다. ‘김을 매는 사람’. 이 논의 모들은 저 농부들이 여름 내내 김을 매어 주어 가을이면 좋은 결실을 보리라. 그러나 이제 운인 선생님이 돌아가셨으니 우리를 위하여 누가 다시 김을 매어줄 것인가?
필자가 선생님께 처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선생님께서 마흔을 갓 넘기셨던 소장 학자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든을 맞으신 올해까지 근 40년 동안 선생님께서 달라지셨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이 늙어 가신다는 엄연한 사실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선생님이 40년 전 이미 일가를 이룬 대학자이고 계속 왕성하고 정력적인 모습으로 동양사학계를 선도하셨을 뿐 아니라, 교육계 언론계 등 우리나라 문화계 전체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선생님의 뒤를 좇아 가려고 노력했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대학 1학년 시절에 느꼈던 것보다 더 멀리 우뚝 서 계셨다. 필자는 동숭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연구실에서 낡은 스웨터를 입고 파이프 담배 향을 뿜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학문의 깊이와 폭은 보다 넓고 높은 경륜으로 이어졌다. 실로 선생님은 공자가 말한 “학문에 여유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學而優則仕)”는 경지에 이르셨고, 그 결과 우리는 정말 보기 드문 ‘문화계의 거목’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님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의 박학과 식견, 그리고 풍부하고 여유 있는 유머에 감탄했고, 한국에도 이 같은 큰 인물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선생님의 그 높은 경륜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셨고, 한발 앞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시고 자신의 역할을 찾으셨다.
바로 이런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 날 한국 동양사학과 역사학의 수준이 이나마 유지됐고, 우리 문화계의 황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거목을 잃었다. 선생님의 서거를 슬퍼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도 선생님, 이제는 편안히 가십시오. 우리는 선생님의 실천적 교훈과 커다란 유산을 되새기며 선생님의 큰 그릇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겠습니다.이성규 서울대 교수·동양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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