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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29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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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식민지 군대를 이끌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측근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아니,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대륙회의에 군통수권을 반납하고 명예로운 은퇴를 택한다. 처음 약속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그 6년 뒤이다.
신대륙의 13개주(州)는 헌법 비준을 둘러싸고 연방주의자와 반대파로 격렬히 맞섰으나 동시에 두 당파의 존경을 받았던 그는 미합중국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됐고, 역시 만장일치로 재선을 강요받는다.
그가 취임한 해인 1789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의 국민군사령관 라파예트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의 열쇠를 그에게 선물했다. 그것은 ‘유럽의 아들’이 구대륙에 선사한 자유(自由)에 대한 답례였다. “미국이 세운 민주주의의 원칙이 바스티유 감옥을 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전 인류의 이익에 기여했다.”(토머스 페인)
혼신의 열정으로 불안했던 신생 미합중국의 기틀을 다졌던 워싱턴. 그는 변함없는 국민적 영웅이었으나 3선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첫 번째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고별사를 작성해 놓고 있었다.
원했다면 ‘킹 조지’도, 종신대통령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선출된 군주(君主)’이거나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마다했다.
“미국 대통령의 권한은 제한적이다. 나의 목표는 그러한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이러한 선례들이 진정한 원칙 위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워싱턴은 선조들이 대서양을 건널 때 그 초심(初心)을 끝까지 간직했다.
1799년 그가 사망하자 미 의회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워싱턴은 전쟁에서도 1인자였고 평화에서도 1인자였으며, 국민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러나 막상 그가 떠나면서 남긴 말은 소박했다.
“이제 나는 가네. 조용히 보내주게나….”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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