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진중권/‘학벌의 벽’부터 허물어야

  • 입력 2004년 4월 25일 18시 47분


‘범생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학창시절 ‘커닝’의 추억을 갖고 있을 게다. 객관식 문제를 풀던 고교시절에는 모범생 친구의 시험지를 훔쳐보고, 주관식 문제를 풀던 대학시절에는 책상이나 강의실 벽에 빼곡히 강의노트를 베껴놓곤 했다. 특히 강의실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거리의 바리케이드 뒤에서 보내야 했던 80년대. 커닝은 저 ‘간악한’ 학사경고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무기였다. 커닝을 해서 장학금 탈 것도 아니고 그저 경고나 면하자는 ‘생계형’ 커닝이라, 훔쳐보다가 들켜도 주의나 받는 선에서 끝나곤 했다.

▼‘생계형’ 아닌 ‘기업형 커닝’ 충격▼

운이 좋았던지 커닝을 하다가 들킨 적이 별로 없다. 이 높은 승률(?)의 비결을 나는 내 눈의 예리함과 내 몸의 민첩함에 돌렸다. 이게 얼마나 야무진 착각인지 깨닫게 된 것은, 대학원 시절 학부생 시험의 감독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감독이 돼 교단에 서면 솔직히 다 보인다. 커닝을 하는 녀석만 보이는 게 아니다. 앞으로 할 녀석, 방금 끝내고 시선 처리하는 녀석까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인다. 한마디로 좋은 것은 내 재주가 아니라 그것을 눈감아 주던 시험감독들의 인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낭만적(?) 유형과는 좀 다른 부류의 커닝도 있다. 얼마 전 대학편입시험과 영어능력검증시험에서 무전기를 동원한 대규모 부정이 행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기업형’ 커닝은 타인의 기회를 부당하게 가로챈다는 의미에서 남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따라서 돈을 받고 이런 행위를 일삼은 자들은 마땅히 법적 처벌을, 그리고 이들에게 돈을 주고 답안을 산 이들은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재미로 하는 것은 ‘서리’지만 돈을 벌려고 차떼기로 남의 밭을 쓸어 가는 것은 ‘절도’다. 이 정도의 차이는 누구나 구별할 게다.

어디서더라? 언젠가 조선시대 과거장에서 적발돼 압수된 거대한 ‘커닝 페이퍼’를 본 적이 있다. 빼곡하게 한자가 적힌 선비의 겉옷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선조들도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에 과거는 그저 시험이 아니라 입신양명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이었으니 이것은 출세형 커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을 강조하던 조선시대의 선비가 이 지경이었으니 오늘날에 와서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며 말세론을 펼 수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조선시대와 달라진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때와 달라지지 않은 사회의 통념이다. 왜 학생들은 무전기를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했을까. 물론 ‘출세’하기 위해서다. 대단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아예 입사원서를 내지도 못할 지경이니 저렇게들 필사적으로 부정행위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학벌이라는 벽이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상에 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심각하게 인지해야 할 문제다.

▼학벌 계급장 떼고 진짜 실력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이 미련한 학벌 미신부터 벗어버려야 한다. 대학간 서열을 없애면 경쟁력이 저하된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런 분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점수의 소수점까지 계산해 가며 학생들의 등수를 매기는 그 잘난 경쟁의 광기가 이 나라 교육 수준을 어느 바닥으로 내려놓았는지 똑똑히 들여다보실 일이다. 게다가 대학간 서열을 매겨놓고 학벌로 인간 차별하는 게 경쟁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거야말로 학벌이라는 계급장 떼고 진짜 실력으로 겨루는 정당한 경쟁을 가로막는 전근대적 신분제가 아닌가.

커닝이 무서워졌다. 기업화되고, 전자화되고, 필사적인 것이 되었다. 시험 하나로 인간의 능력을 규정하고, 성적만으로 신분을 나누는 인습이 이제는 사라질 때도 됐다.

진중권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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