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아동 법정세워야 하나…“조서만으로 증거 부족”

  • 입력 2003년 10월 30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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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서 진술을 거부한 사건에 대해 증거 부족을 이유로 피의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 피해자측은 피해아동의 정신적 충격을 우려해 법정 진술 대신 진술 조서와 정신과 치료 과정을 담은 녹화테이프를 제출했으나 증거 자료로 인정되지 않았다.

서울지법 서부지원(형사1단독 안승국·安承國 부장판사)은 30일 5세짜리 여자 어린이를 성추행한 혐의(미성년자 의제 강제추행)로 불구속 기소된 홍모씨(56)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홍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출두해 진술하지 않는다면 피해자가 증거로 낸 경찰, 검찰에서의 진술 조서로는 증거 능력이 부족하다”며 “이는 형사소송법 314조의 예외조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진술자가 사망, 질병, 외국 거주, 또는 기타 사유로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을 경우 법원이 전문(傳聞)증거에 대해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전문증거란 법정에서 판결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증언을 증인이 직접 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증언이나 진술서, 비디오 화면 등 간접적인 형태로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해자측은 피해를 본 어린이가 법정에서 당시 상황을 진술할 경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이라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으나 그러한 개연성만 있을 뿐 근거자료가 없다”면서 “따라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보장,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피해자가 제출한 증거는 전문증거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피해 아동이 법정에서 진술을 할 경우 겪을 수 있는 심리적 고통을 형소법 314조의 ‘기타 사유’로 인정하지 않은 것.

피해자 이모양(현재 10세)의 어머니 송영옥씨(44)는 1998년 딸의 피해 사실을 알고 당시 유치원 원장이던 홍씨를 검찰에 고소했으나 검찰은 “피해자가 당시 정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송씨는 이에 불복, 헌법소원을 제출했고 끈질긴 법정투쟁 끝에 지난달 가해자 홍씨에 대해 징역 3년의 구형을 이끌어냈다.

이날 판결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성폭력 피해 아동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법률사무소 청지의 강지원(姜智遠) 변호사는 “참혹한 기억을 재생하라는 것은 아동에게 있어서는 가혹행위”라며 “피해아동의 심리적 고통을 고려하지 않은 성인과 남성 위주의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피해자 이모양(현재 10세)의 어머니 송영옥씨(44)는 무죄 판결에 대해 “우리나라는 가해자의 인권에 너무 후하다. 지금 딸에게 법정 진술을 시킨다면 그동안 딸을 치료한 것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며 즉각 항소할 뜻을 내비쳤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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