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병영문화 개선’ 한달 …장군보다 무서운 이등병

  • 입력 2003년 9월 17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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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강원도 모부대 병영 막사 앞. 박모 병장이 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이등병을 불렀다.

“거기 김○○ 이등병님, 이리로 와 보세요.”

“네, 이병 김○○!”

이등병이 힘차게 관등성명을 대며 가까이 다가오자 병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밖에서는 큰 소리로 관등성명 대지 말랬잖아. 남들이 보면 내가 시킨 줄 알 거 아냐. 누구 영창 가는 꼴 보고 싶냐?”

“네, 시정하겠습니다!”

“이 ××가. ‘시정하겠습니다’도 큰 소리로 하지 말랬잖아.”

옆에 있던 한 상병이 웃으며 병장을 말렸다. “박 병장님, 지금 그 욕도 신고하면 영창 갑니다.”

군 병영이 변하고 있다. 육군이 지난달 17일 △사병 상호간 ‘얼차려’(기합) 금지 △언어폭력이나 반말, 심부름 금지 등을 골자로 한 ‘사고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한달이 지난 뒤 병영이 예전과는 딴판으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각 부대는 거의 매일 정신교육을 통해 이 종합대책을 병사들에게 숙지시키고 있다. 창군 이래 처음 불고 있는 병영문화의 대대적인 개혁 바람인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짬밥당번’의 변화.

식판 닦기는 과거에는 신병들의 몫이었으나 최근에는 식사를 마친 뒤 부대원들이 모여 가위바위보로 식판 닦는 당번을 결정하는 부대가 늘었다.

당연히 후임병들의 군 생활은 편해졌다. 한 이등병은 “집합이나 구타도 사라지고 ‘고참 안마하기’ ‘축구할 때 후임병들은 항상 뛰어다니기’ ‘방독면 쓰고 군가 부르기’ 등 부당한 군대문화가 많이 사라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욕설은 줄었지만 군기는 엉망이 됐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달 초 강원 강릉시 육군 모부대 정비대대에서는 한 취사병이 영창 신세를 졌다.

고참이 신병에게 “야 이 ××야, 넌 쌀도 제대로 못 씻냐”고 가벼운 욕을 했는데 신병이 이를 장교에게 신고한 것. 이 일로 내무반 최고참인 분대장도 연대책임을 지고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도는 징계를 받았다.

이후 부대에서는 고참들이 이등병들만 보면 “장군보다 무서운 이등병님 지나가신다. 조심해라”며 웬만하면 지시도 하지 않는 등 몸을 사리고 있다.

최근 강원 모부대에서 일어난 일.

저녁 식사 뒤 고참이 몇몇 후임병에게 총기 손질을 지시했더니 한 일등병이 “그거 소대장님 지시입니까? 소대장님 지시 아니면 안 해도 된다는데요. 그리고 쉬는 시간인데 지금 꼭 해야 합니까?”라며 따졌다.

이 부대 최모 상병은 “총을 닦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을 정도로 군기가 없는 부대가 유사시 어떻게 통솔이 되겠느냐”며 “평소에는 친구처럼 지내다 비상상황 때 선임병에게 통솔 책임을 맡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지시”라고 지적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전문가 시각▼

육군의 ‘사고예방 종합대책’에 대해 장교와 전문가들은 찬반으로 견해가 갈리면서도 대체로 “취지는 공감하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장교는 “병영 내 각종 군기사고가 대개 병 상호간의 사적 간섭이나 불합리한 지시에 의해 촉발된 경우가 많은 만큼 이를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일선 지휘관들도 취지에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다”고 긍정평가했다.

반면 다른 장교는 “전에 신병이 낫질을 하다 손가락이 잘리는 바람에 전 부대에서 낫 사용을 금지해 수백명이 손으로 잡초 뽑느라 엄청 고생한 적이 있다”며 “조그만 사고를 막겠다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부대의 군기까지 위에서 강제로 없애면 어떻게 병사들을 통솔하겠느냐”고 말했다.

국방대학원 국제관계학처 김병조(金秉祖) 교수는 “사병의 인격은 존중돼야 하지만 문화를 바꾸는 문제를 법으로 교정하는 것은 지나칠 수 있다”며 “처음엔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로 시작해 점차 규정을 확대해 가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재향군인회 이종간 조직국장은 “제도를 고친다고 문화가 금방 바뀌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며 “왜 이런 궁여지책이 나왔는지 군 스스로 자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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