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입력 2003년 6월 11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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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의 정월 초하루에 찍은 가족사진. 아랫줄 왼쪽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윗줄 왼쪽부터 나 여동생 남동생.-사진제공 유석춘씨
1970년대 초의 정월 초하루에 찍은 가족사진. 아랫줄 왼쪽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 윗줄 왼쪽부터 나 여동생 남동생.-사진제공 유석춘씨
만월홍안(滿月紅顔). 여섯 달의 투병 끝에 99년 1월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당신의 동료들이 추억하며 골라낸 단어다. 지금도 불현듯 아버지가 필요할 때, 그리울 때면 난 이 친밀한 단어와 조우한다. 책장에 꽂혀 있는 부친의 유고집 제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여기저기 아무런 계획 없이 읽다가 우연히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리곤 당신 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이렇게도 나의 아버지와 닮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릎을 친다.

“우리 집의 경우 내 마음 속의 아버지는 사랑보다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집에서나 유독 아버지만은 엄한 권위의 상징처럼 아이들의 생활을 규율하고 훈계하는 존재였음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장판방을 쓸어내는 빗자루인 개꼬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분도 늘 아버지였고, 글은 안 읽고 날마다 강가에 헤엄만 치러 다니다가는 ‘인 안 된다(사람 안 된다)’고 꾸중하시는 분도 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엄격함에 대한 아버지의 반발이 성장기의 나에겐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친구들과 달리 공부를 안 해도 또 못된 짓을 해도 아버지로부터 엄한 꾸중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번 아버지의 속내가 드러난 경우가 있었다. 중학생 시절 당시 유행하던 통기타가 배우고 싶어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방에서 뚱땅거릴 때였다. 난생 처음 아버진 공부 안하며 기타만 쳐대는 내 모습에 대한 실망을 엄청난 분노로 질타하였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변신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그런 아버지의 관심 덕택에 난 삶의 기율이랄까 절도에 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곤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자식에게 전기기타를 사주며 공부도 잘 해야 한다는 소릴 빼놓지 않고 있다. 결국 ‘자식이 아버지 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또한 당신 동료들이 기억하는 친밀함과 당신 가족들이 지켜야 했던 엄격함 사이에 존재하여 온 팽팽한 긴장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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