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평화재단포럼]21세기 새로운 '광복'을 위해

  • 입력 2002년 8월 14일 18시 07분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온 국민의 단합된 힘과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 수백만의 응원인파가 쏟아내는 ‘대∼한민국’의 구호 속에서 민족분단을 극복하고 국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광복 57주년을 맞은 지금도 우리에게 통일은 여전히 요원한 과제다. 민족적 에너지를 결집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권도 정쟁(政爭)으로 지샐 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와 21세기평화재단(이사장 권오기·權五琦)은 ‘8·15’가 가져다 준 광복과 분단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고 민족의 저력을 결집하는 데 필요한 어젠다를 찾기 위해 ‘평화포럼’을 개최했다. 동아일보 광화문사옥에서 열린 포럼에는 권오기 이사장과 강원용(姜元龍) 평화포럼 이사장, 김경원(金瓊元) 사회과학원장이 참석했다. 참석자 3인은 21세기평화재단의 이사들이다.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평화연구소(설립자 김병관·金炳琯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는 각종 학술 문화사업과 민간교류 등을 통해 한반도의 화합과 번영을 촉진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0년 4월 창립된 공익재단이다.》

▽강원용 이사장〓8·15를 맞는 감회가 남다릅니다. 8·15 직전 회령경찰서에서 구속됐다가 병보석으로 나왔는데 소련군이 참전한다고 해서 산 속에 들어가 있었지요. 멀리서 애국가가 들려오고 태극기를 흔드는 것이 보였는데 그때가 8·15 나흘 뒤였습니다. 일제 말 한국 사람들은 일본말을 했고 어린애들도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는 등 일본사람처럼 돼 있었지만 광복이 되니 완전히 달랐습니다. 속에 잠재해 있던 것들이 다 나온 것입니다. 50여년간 남과 북이 서로 달라진 게 많다지만 몇천년간 함께 축적해온 역사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입니다.

▽권오기 이사장〓함석헌(咸錫憲) 선생도 ‘우리에게 자유만 주어지면 하루아침에 똑같아진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지요. 그러나 광복 전까지 일본이 조선사람의 못난 점만 얘기한 데 대한 반작용 탓인지 광복 후 우리는 우리가 잘났다는 얘기만 했습니다.

▽김경원 원장〓8·15를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광복과 동시에 분단을 야기한,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했다기보다는 국제정세가 그렇게 흘러갔던 것입니다. 미국 역사가들은 당시 분단이 안됐다면 미국이 소련군을 한반도에서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8·15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따른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강 이사장〓힘의 역학관계에서 미국이 소련에 모두 내줄 수 없으니, 차라리 분단상황을 택했을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반도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됐느냐 하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가쓰라-태프트조약에 따라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이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마치 물건 흥정하듯이 한 것입니다. 이젠 자주적인 입장에서 강대국과 이해관계를 조절하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권 이사장〓우리의 독립이 아직 미완성이란 것은 국제적 문맥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독립의 의미는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약합니다. 독립이나 통일이 무슨 이벤트나 행사같이 여겨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런 거품을 걷어내는 것이 진정한 8·15광복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평양에 가서 한 일은 역사적인 일이지만, 우방국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불쑥 일처리를 하다보니 일회성 이벤트로 그친 듯합니다. 남북문제는 복잡한 연립방정식입니다.

▽김 원장〓국제정세가 왜 그렇게 흘러갔느냐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객관적 인식이 중요합니다. 북한은 ‘주체’를 좋아하고 있지만 먹는 것도 동냥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경제적 궁핍이 북으로 하여금 남북대화에 응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그런 접촉의 결과 조금씩 화해로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 동기가 화해라고 판단해선 안됩니다. 북한은 경제몰락과 식량부족으로 인해 해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게 우리에겐 엄청난 역사적 기회입니다.

▽강 이사장〓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을 적대관계로 대할 필요도 없고, 우방이라고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남북문제는 결국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남과 북은 영원히 원수로 살 수도 없고 하루아침에 친구가 될 수도 없습니다. 북한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북한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70년대 초까지도 우리보다 나았던 북한 경제가 지금은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카리스마적 존재였던 김일성(金日成)이 죽었고 북한을 지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의 상황도 달라졌습니다. 평화통일을 포기해서도 안되지만 성급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게 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면서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권 이사장〓남북이 점진적으로 접근하려면 정말 우리 책임 아래에서 뭘 해야 하는데, 우리 힘만으로는 북한 사람을 다 먹여 살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미국과도 얘기해야 합니다. 통일 후 얼마나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를 미리 생각하고 밑그림도 그려야 합니다. 이벤트식으로만 생각해선 안됩니다.

▽김 원장〓북한에 상당히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의 위기가 큰 문제일 것입니다. 공산주의 붕괴에 대한 서방측 코멘트 중에서 ‘믿음의 상실이 그들에게 위기를 가져왔다’는 대목이 기억납니다. 공산주의 신앙을 기초로 새로운 사회 모형을 건설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는데 그게 다 잘못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바로 그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큰기침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어떤 모델을 생각하며 위기를 타개할 것인지 상당히 어려울 겁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 인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외부와 통풍이 되도록 창문을 조금씩 열어 북한 사회를 정상화하는 일입니다. 독일도 하루아침에 통일된 것이 아니라 20여년간 꾸준한 준비를 했습니다.

▽강 이사장〓이데올로기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선거에서도 이데올로기나 정책대결이 없습니다. 그래도 비관은 안합니다. 독일은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펼 때 모든 것을 국회와 논의하고 절대로 야당에도 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족문제는 초당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각 정당들이 권력 싸움에 이걸 써먹고 있어요.

▽권 이사장〓통일을 위해서는 전략적으로는 낙관주의이면서 전술적으로는 비관주의가 필요합니다. 21세기는 크게 낙관적으로 보더라도 그 과정의 여러 단계들은 비관적으로 보고 대처할 필요도 있습니다. 미국과 의논하고 중국을 달래는 등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짜서 접근해야 하다고 봅니다.

▽강 이사장〓한반도 문제에서는 미국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우리 입장에서 봐달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1949년 미국은 한국에 자문위원단 500명만 남기고 다 철수하고 다음해에는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빼버렸어요. 그런 과오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우방으로서 요구해야 합니다.

▽권 이사장〓한반도 문제를 푸는 데는 우리도 세계적 관점에서 보기 위해 노력하고, 미국도 지역적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강 이사장〓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듣고 ‘기독교와 이슬람국가간 전쟁’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북한을 끌어넣은 것이 아닌가 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미국이 세계지도만 보고 한반도 정책을 펴면 안된다는 점을 설명해줘야 합니다.

▽김 원장〓지금 국제정세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다행입니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는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일본의 통치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미국이 좋건 싫건 개입하고 있고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도 지금 가장 좋습니다. 이 기회를 포착해서 견고한 평화체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집안을 잘 추슬러야 합니다. 대외정책, 대북정책을 갖고 여야가 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치에 일대 전환이 없으면 국제상황이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갖다 준다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강 이사장〓월드컵 때 정작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붉은 악마들이었습니다. 700만명이 거리에 쏟아져도 사고 한 건 안 생기고 청소도 깨끗이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도 못하는 일입니다. 한국 사람은 신바람만 나면 못해내는 것이 없습니다. 정치가 국민을 신바람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이 존경하고 돕고 싶은 정치세력이 나와야 남북문제도 해결됩니다.

■참석자

▼강원룡▼

△1917년생

△캐나다 매니토바대 신학박사

△경동교회 당회장

△세계종교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

△통일고문회의 의장

△평화포럼 이사장

▼권오기▼

△1932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 사장

△서재필기념재단 이사장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울산대 석좌교수

△동아일보 부설 21세기평화재단 이사장

▼김경원▼

△1936년생

△서울대 법대 졸업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박사

△미국 뉴욕대·고려대 교수

△주미 대사

△사회과학원장

△고려대 석좌교수

정리〓이철희기자klimt@donga.com

윤종구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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