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불안하다<5>]열악한 병원 치료 현장

  • 입력 2002년 5월 21일 18시 06분


서울의 한 종합병원 소아과 의사 박모씨(36)는 ‘의료사고’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는 인터뷰 요청도 정중히 거절했다.

박씨는 대학병원 전공의 시절 의료사고에 휘말렸다. 당시 오전 1시경 생후 10개월인 아기가 열이 펄펄 끓는 상태로 응급실로 들어왔고 박씨는 간호사를 통해 해열 처방을 한 다음 숙직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간호사는 1시간마다 열이 39도라며 전화했고 그는 “옷을 벗겨라” “알코올로 몸을 닦아라” 등 처방을 내린 뒤 새벽 4시경 내려왔다. 그러나 아기는 곧바로 숨지고 말았다.

그는 법정에서 “사흘 동안 한잠도 못 자서 도저히 눈꺼풀이 떠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글 싣는 순서▼

- ①병 고치러 갔다 병 걸린다
- ②응급실 시설-인력 태부족
- ③ '목숨'있는곳에 의사가 없다
- ④‘보험수가의 덫’ 양심진료 막는다

병원이 낮은 보험 수가로 인한 적자를 면하기 위해 전공의들을 저임에 고용해 ‘혹사’시키고 있어 전공의들의 피로와 미숙함으로 인한 의료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01년 조사 결과 전공의들은 하루 13∼18시간 일하면서 1년에 1800만∼2000만원 정도를 받고 있으며 88%는 야근 다음에도 정상 근무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과 외과 등에서는 전공의 한 명이 30∼50명의 입원 환자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1999년 대한병원협회는 전공의를 400병상 이하 병원에 우선 배치한다고 의결했는데 이는 전공의를 피교육자가 아니라 저임 의사로 쓰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전공의협의회 이동훈(李東訓) 회장은 “전공의는 6년간의 의대 교육, 의사고시, 1년간의 수련의 과정을 거친 의사이면서 피교육생이지만 피교육생인 전공의가 사실상 병원을 꾸려나가고 있다”면서 “전공의에게 과도하게 진료를 의존하는 현행 병원 시스템만 고쳐도 수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병원은 전공의가 없으면 병원이 마비되며 서울 S병원은 전공의가 부족해서 국내 유일의 중증 진폐증 병동을 철폐할 위기에 처했다. 이 밖에 최근 교수들의 개원 바람 때문에 D병원, K병원 등의 일부 과는 교수 없이 전공의만으로 꾸려나가고 있다. K병원의 경우 올해 안과 의사들이 모두 개원해버려 전공의들이 P병원으로 급히 옮기기도 했다.

‘전문의-전공의-수련의’의 수직 명령 체계도 환자 치료에 장애가 되고 있다. 응급 상황에는 전문의가 빨리 처치해야 하는데, 수련의가 최초로 환자를 보고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가 나설 때는 이미 시기를 놓친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신설 의대의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받고, 필기시험인 의사고시에 합격한 의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병원 현장의 ‘교육 시스템’이 더욱 혼란에 빠지고 있다.

신설 의대는 1995년 4곳, 96년 이후 5곳이 생겼는데 대부분 실험실습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지방의 의대는 교수 수가 적정 인원에 절반도 못 미치는 바람에 서울의 의대 교수를 외래교수로 초빙해 정상적으로는 학생들이 몇주 동안 교육받아야 할 내용을 하루종일 강의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료법학회 한동관(韓東觀) 회장은 “미국에서는 정부가 의사 양성 과정에 책임을 지고 매년 병원에 전공의 교육비로 1인당 수만달러를 지원한다”면서 “의대에서부터 전공의까지 의료 교육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국민의 고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

채지영기자 yourcat@donga.com

-끝-

▼의료전문 신현호 변호사▼

“의료사고를 줄이려면 의료 교육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편이 시급합니다.”

의료전문 신현호(申鉉昊·사진) 변호사는 현재 세부적인 의술의 습득에 치중돼 있는 의대 교과 과정을 일반 교양교육이 많이 포함되도록 개편하고 전문적인 지식은 전공의 때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의료 사고가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 변호사는 “시민의 의식은 ‘의사 주권’에서 ‘환자 주권’으로의 이행을 요구하는데 의사는 여기에 못 따라가고 있다”면서 “의대 교육의 개선을 통해 의사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정부는 병원에 적정 이윤을 보장해서 전공의들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보험수가로는 병원이 저임의 전공의들을 ‘주력 부대’로 삼지 않고는 경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처럼 전공의 교육비를 병원에 지원하는 제도도 검토해야 한다는 것.

그는 ‘의료분쟁조정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의료진의 과실 여부가 불명확한 사고를 당한 환자나 보호자에게는 국가에서 일정액을 보상하고, 병원 및 의사의 과실이 명확한 경우에는 적정액의 보상이 보다 쉽고 빨리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

신 변호사는 “자동차책임보험처럼 의료계에도 ‘배상책임보험제도’를 의무화하거나 널리 확산시켜 의료사고 때 보험을 통해 환자들에게 보상액을 지급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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