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조종사가 본 파업]"노사대화도 없이 파업 상상안돼"

  • 입력 2001년 6월 14일 18시 35분


“조종사노조와 회사가 충분한 대화도 없이 파업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몇 번 만나지도 않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발을 묶는 항공사 파업이 시작되는지….”

13일 타결된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의 파업을 지켜본 대한항공의 미국인 폴 길크리스트 기장(49)은 “항공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만큼 노사 양측이 파업 문제에 좀 더 신중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14일 새벽 홍콩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길크리스트 기장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동료인 한국인 조종사들이 큰 사고 없이 파업을 풀고 업무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자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미국이나 유럽 항공사들도 파업은 합니다. 그러나 노동법 규정이 단계적 타협을 유도하고 있어 전면파업에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지요. 조종사들이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등 한국에서 말하는 소위 ‘준법투쟁’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협상과 대외공표 등 노동법이 정하는 절차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불법파업이 돼 강력한 제재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

“안전운항이라는 이슈를 가지고 조종사들이 똘똘 뭉쳤던 지난해 파업과 달리 올해 파업은 별다른 이슈가 없었어요. 파업 돌입 때까지 조종사들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10월 조종사 파업도 겪었던 그는 이번 파업에서 회사의 대응방식이 훨씬 세련돼졌다고 평가했다. 첫 파업이어서 우왕좌왕하던 모습을 보이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원칙을 갖고 일관되게 대응했다는 것. 다만 노조와 충분한 대화를 갖지 못해 ‘파업’까지 가게 한 것은 협상기술이 다소 서툴렀다는 느낌이 든다고 평가했다.

“이번 노사 협상 과정에서 조종사 노조가 임금을 많이 받는 외국인 기장과의 위화감 때문에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 비행 때 젊은 한국인 기장과 팀워크를 이루며 친하게 지내는 저로서는 노조가 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싱가포르항공 등 아시아 지역 항공사에서만 10년 이상 항공기를 몰다가 99년 대한항공으로 옮겨온 길크리스트 기장은 아시아 지역 조종사들의 성향이나 가치관에 익숙한 편이라고 한다. 그는 “젊고 능력 있는 아시아권 부기장들은 같이 일을 하면 금세 친해져 덩달아 젊어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며 “조종사노조가 의도적으로 내외국인 기장간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번 파업 때문에 한국 조종사들과 외국인 조종사들 사이에 갈등 구조가 생길 것이란 우려도 있지만 전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종사들은 일로 승부하는 프로이기 때문이죠.”

길크리스트 기장은 마지막으로 “노사 갈등은 사소한 문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 같다”며 “사측은 휴일 근무 스케줄이나 수당 지급 시기 등 디테일한 문제에 대해서도 신경 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송진흡기자>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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