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3교실에선 上]"공부는 밤에 학원에서…"

  • 입력 2001년 5월 1일 18시 34분


《학원 공부에만 매달리고 학교 공부는 무시하는 등 ‘공교육 붕괴’ 현상에 대한 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실제 고교 3학년 교실현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본보 취재팀이 서울 강남과 강북의 고교 3학년 교실에 들어가 꼬박 하루를 함께 지내면서 고3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직접 취재했다. 학교측의 사전양해를 얻어 이루어진 이번 르포기사는 요즘 공교육의 실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 8학군의 한 인문계 고교 3학년의 1교시 현대문학 시간. 교사가 칠판에 ‘개화기의 문학―아리랑타령’이란 수업제목을 적었다.

“고득점을 위해 현대시 부분은 중요하다. 특히 시 감상 문제는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정답을 고르기 힘들다. 따라서 평소 많은 시를 접하고 감상하는 태도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

그 순간 ‘삐리리’하는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교사의 강의가 끊어지고 교실은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다. 휴대전화의 주인은 맨 앞줄에 앉아 졸고 있던 학생. 하지만 곤한 잠에 빠져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교사가 다가가 고개를 흔들어 깨우고서야 화들짝 놀라 휴대전화를 껐다.

이처럼 매시간 졸거나 자는 학생은 4분의 1 가량. 깨어있는 학생들이라 해도 강의내용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책상 위에는 수업과 관계없는 학원 교재들이 많이 놓여있었다.

3교시 수학시간. 이날 수업은 가평균을 이용해 표준편차를 구하는 내용. 대입 수능시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아서인지 전 시간보다 조는 학생이 더 늘었다. 몇몇 학생들은 아예 칠판 한번 쳐다보지 않고 혼자서 ‘자율학습’을 했다. 이따금 교사가 옆을 지나면서도 이런 학생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모군(18)은 “예체능계를 지원할 것이기 때문에 대입에 필요 없는 수업”이라며 “인문계 한 반에 예체능 지원생이 서너명씩 끼어있어 수학과 제2외국어 같은 시간에는 드러내놓고 다른 공부를 해도 선생님들이 그냥 놔둔다”고 말했다.

오전 수업 내내 엎드려 잠을 자던 김모군(18)은 점심시간이 돼서야 눈을 떴다. “수업이 재미도 없고 학원에서 이미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다.

몇 과목은 그런 대로 열중하는 편이지만 나머지는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라는 게 그의 변. 김군은 학교보다 학원을 더 믿는 눈치다. 김군의 성적은 반에서 5등으로 우수한 편.

이 학급에서 방과후 학원에 다니는 학생은 30여명. 개인과외를 받는 학생까지 포함하면 서너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학생이 사교육을 받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달려간다는 최모군은 “솔직히 학교에서 배우는 걸로는 시험문제 하나도 못 푼다”고 말했다. 교과서에만 의존하는 학교 수업으로는 수능시험에 대비할 수 없다는 것. 옆에 앉은 강모군은 “어떤 선생님은 출제경향 분석도 하지 않고 학생들이 듣든 말든 자기 혼자 책만 읽고 나간다”고 말했다.

오후 4시 20분. 아직 한낮이지만 하루 8시간의 학교수업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집으로 가든 운동장에서 놀든 자유. 오후 6시까지 10교시가 넘는 수업을 받고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밤늦게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10여년 전과는 전혀 다른 요즘 고3 교실의 분위기다.

자율학습을 위해 교내도서관으로 이동하는 몇몇 학생들을 붙잡고 물었다. 거부감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학생들은 요즘 교육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는 듯 불만을 쏟아냈다.

최모군은 “수능 쉽게 낸다고 과외나 학원에 가는 학생이 줄지 않는다”면서 교육부가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무시험제, 야간자율학습 폐지 등을 시행하고 있지만 방과후 고3생들이 갈 곳은 학원뿐이라는 것.

박모군은 “좋은 대학엘 가야 살아남는 사회 시스템은 여전한데 학교만 ‘하향 평준화’시키는 것은 오히려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요즘 유행하는 조기유학에 대해서는 심드렁한 반응이 많았다. 박군은 “조기 유학가는 학생 중에는 한국에서 대학가기 힘든 애들도 많다”면서 “마치 유학 못가는 학생은 능력이 뒤떨어지는 양 인식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 조기 유학을 떠난 학생수는 해마다 평균 30여명. 국제통화기금(IMF) 경제난이 계속되던 98년에 10명으로 뚝 떨어졌지만 그 후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에는 한 반 학생수에 해당하는 43명이 조기유학을 떠났다.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학생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학원에 갈 시간이 된 것. 다른 학생들도 일제히 도서관을 빠져나와 학원으로 향했다.

<김창원기자>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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