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고려장 택시기사-폭설속 할아버지 산에 두고 도망

  • 입력 2001년 1월 9일 19시 51분


지난 8일 서울 도봉구 창2동에 사는 박종대 할아버지(68)는 참기 힘든 수모를 겪었다. 한 택시 운전기사의 횡포 때문에 서너시간 동안 폭설로 뒤덮힌 산길을 헤매다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이날 친척의 입원증명서를 떼기 위해 박할아버지가 집을 나선 시간은 새벽 6시쯤. 할아버지는 경기도 마석에 있는 C병원에 가기 위해 마석 시내버스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택시를 잡기로 했다.

그러나 C병원이 산을 깎아 만든 외진 곳에 있는데다 전날부터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러워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마석종점에서 C병원까지 평소 택시요금은 5000원선.

박할아버지는 2만원을 내라는 택시 기사에게 통 사정한 끝에 1만5000원을 주기로 하고 택시를 잡았다.

황당한 일은 할아버지가 1시간 동안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나왔을 때부터 벌어졌다. 박할아버지는 타고왔던 택시가 그대로 있어 다행이다 싶어 다시 그 택시를 탔다.

그런데 마석종점까지 할아버지를 태우고 온 택시기사는 할아버지에게 무려 평소 요금의 10배인 5만원을 요구했다. 기다린 시간에다가 내려올 때의 요금을 보탠 것이라고 했다.

박할아버지는 가진 돈이 1만5000원 밖에 없었고, 기다리라고 한 적도 없는 택시 기사의 횡포에 어이가 없어 1만5000원만 받으라고 설득했지만, 택시기사는 끝까지 5만원을 받아야겠다며 우겼다.

이때부터 택시기사는 막무가내였다. 겨우 서른이 넘을까 말까하는 기사는 할아버지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다가 여의치 않자 할아버지를 태우고 산꼭대기로 거슬러 올라가 병원에 데려다놓고는 줄행랑을 쳤다. 강제로 '고려장'이라도 치를 기세로…

저녁이 다 된 시간에다 워낙 외진 곳이라 할아버지는 다시 택시를 잡지도 못하고 종점까지 걸어가야 했다. 눈길에 미끄러지고 엎어지고 하면서 서너시간을 고생한 끝에 겨우 마석종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날 박할아버지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한 택시기사의 횡포 때문에 거의 눈속에 고립될 뻔한 할아버지를 보고 식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이 눈에 젖어 마치 조난당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박할아버지의 딸 미정씨(28)는 9일 "아무리 사회가 메말라 간다고들 하지만 연로하신 분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폭설로 되돌아 오기 힘든 산꼭대기에 내려놓은 걸 보고 할말을 잃었다"며 인정 없는 세상을 한탄했다.

미정씨는 "아버지가 택시회사와 기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면서 "택시요금 인상은 계속되는데 서비스는 개선되지 않는 택시업계가 한심하고 놀라울 뿐"이라고 말했다.

안병률기자/동아닷컴 mokd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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