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금융 귀재' 진승현씨는 '21세기 김선달'

  • 입력 2000년 12월 4일 18시 36분


‘뉴욕의 월가(街)에서 선진 금융기법을 배워 온 금융의 귀재. 기업 인수합병(M&A) 전문가.’

MCI코리아 대표 진승현(陳承鉉·27)씨는 ‘시장’에서 이렇게 불렸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그의 실체는 ‘사기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골동품을 파는 무역회사를 그럴듯한 해외 투자은행컨소시엄으로 꾸며 거액의 외자를 유치하는 것처럼 투자자들을 속였다. 또 왼쪽 주머니에 있는 돈을 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금융 감독기관을 속였다. 금융 사기의 ‘감초’인 주가 조작도 빼먹지 않았다.

진씨는 올해 4월 자본금이 5만 스위스 프랑(약 3000만원)에 불과한 소규모 골동품 무역회사인 스위스 소재 ‘오리엔탈 제이드’의 이름을 ‘스위스 프리바트방크 컨소시엄(SPBC)’으로 바꾸도록 해 스위스 민간은행들이 투자하는 것처럼 속였다.


그는 퇴출 위기에 몰린 아세아종금에 SPBC가 8000만달러를 투자하는 것처럼 꾸민 뒤 이 회사 주식 870만주를 단돈 10달러에 넘겨받았다. 진씨는 곧 아세아종금의 이름을 ‘한국―스위스’를 상징하는 ‘한스’종금으로 바꿨다.

진씨는 금융감독원이 SPBC의 투자 능력을 의심하자 현대창투를 통해 한스종금에서 350억원을 대출받아 MCI코리아에 넣고 이를 다시 한스종금에 증자 담보용으로 예치했다. 왼쪽 주머니의 돈을 빼내 오른쪽 주머니에 넣으면서 부자인 것처럼 허풍을 떤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 비율을 조작하는 수법도 똑같았다. 진씨는 올 6월 한스종금의 BIS 비율이 ―4%에 불과해 퇴출당할 위기에 처하자 한스종금 자금 1400억원을 명의뿐인 ‘NIC코리아’라는 회사에 대출해 주고 이 돈을 다시 명의만 있는 ‘BB 무역’ 등에 분산 예치했다. 그는 분산 예치한 돈으로 한스종금이 3만원씩에 매입한 LG텔레콤 주식을 15만원씩에 사도록 하는 수법으로 한스종금이 1127억원의 주식 매매 차익을 벌어들인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는 한스종금 BIS비율을 11.06%로 조작한 뒤 금감원에 허위 신고해 공표하게 했다.

금융계에서는 진씨 외에도 많은 ‘금융전문가’와 기업들이 비슷한 수법을 써먹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 증권사 국제부 직원은 “해외 전환사채를 발행해 외자를 유치했다는 기업의 절반 정도는 미리 국내의 인수자를 정해 놓고 일시적으로 외국계 금융기관 또는 국내은행 해외법인들에 인수시킨 뒤 일정 수수료를 지불하고 재인수한 가짜 외자 유치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뛰는 '벤처졸부' 등치는 '검은손'▼

‘뛰는 청년 벤처갑부’ 위에는 ‘나는 사기꾼’이 있었다.

한국디지탈라인 정현준(鄭炫埈)사장에 이어 MCI코리아 대표 진승현(陳承鉉)씨도 ‘믿었던’ 측근에게 사기를 당한 사실이 검찰수사로 드러났다. 이를 두고 법조인들은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큰돈을 만지게 된 철없는 벤처기업가의 돈은 ‘눈먼 돈’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라고 입을 모았다.

MCI코리아 부회장이기도 한 진씨의 경우 회장으로 모셨던 김재환씨(55)에게 4억8800만원을 사기 당한 사실이 김씨의 자백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8월부터 11월까지 진씨에게서 변호사 선임비 명목으로 12억5000만원을 받아 이 중 4억8800만원을 개인용도로 착복했다는 것.

구속영장청구서에 따르면 김씨는 진씨에게 “돈을 모두 변호사비용으로 썼다”고 거짓말을 한 뒤 7000만원은 자신의 집에 숨겨놓고 3억7800만원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명의로 통장을 만들어 입금했으며 4000만원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는 것.

검찰의 수배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던 궁박한 처지에 ‘중책’을 맡겼던 진씨로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 됐다.

정현준씨 역시 평소 ‘어머니’로 부를 정도로 믿었던 이경자(李京子)동방금고 부회장에게 사기를 당한 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는 ‘정관계 로비설’로 ‘복수’를 시도했었다. 이씨는 회사 돈을 마치 사채인 것처럼 속여 정씨에게 빌려주면서 높은 선이자를 챙겨왔다는 게 정씨의 주장이었다.

정씨는 또 ‘청와대 과장’을 사칭한 청와대 청소담당 기능직원 이윤규씨(36)에게 속아 생활비와 술값 등 4억여원을 고스란히 갖다 바치기도 했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젊은 벤처기업가들이 순진해서 사기를 당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벤처호황 때문에 돈의 씀씀이가 헤퍼지면서 나온 세태”라고 말했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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