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실질심사 기회 뺏었다" 폭행혐의 피의자 석방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8시 52분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에 앞서 피의자를 직접 불러 억울함 등을 듣도록 하는 제도가 구속영장실질심사(구속전 피의자심문)제도다. 그런데 한 재판부는 경찰이 이런 기회를 일방적으로 박탈했다고 해서 한 폭행혐의자의 구속을 이례적으로 취소해 석방했다.

이번 결정은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인권 보장을 위해 ‘미란다 원칙’(체포시 진술거부권 등 알려줘야 한다는 원칙)과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 등 법이 정한 권리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법원의 원칙을 재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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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환부장판사 문답]"영장실질심사 수사기관 박탈 안돼"

▼"인권 최대한 보장" 재천명▼

▽사건 경위〓실형 전과 4범인 박모씨(36·대리운전알선업)는 8월31일 함께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한 여인을 때려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힌 혐의로 고소됐다.

박씨는 10월6일 서울 남부경찰서에 체포됐다. 다음날 구속영장이 청구됐지만 영장에는 박씨가 영장실질심사를 원치 않는다고 기록됐다. 구속영장은 영장실질심사없이 발부됐다. 박씨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구속기소돼 서울 남부지원 형사1단독 박시환(朴時煥) 부장판사의 심리로 재판을 받게 됐다.

박씨는 첫 공판에서 “왜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했느냐”는 박 부장판사의 질문에 “심문을 받겠다고 두세 차례 이야기했지만 경찰관이 ‘범행 동기도 좋지 않고 전과도 있으니 받으나 마나’라며 만류했다”고 진술했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 받아▼

▽법정 공방〓이 진술의 사실 여부를 따지기 위해 22일 ‘별도로’ 열린 재판에는 박씨를 수사했던 서울 남부경찰서 김모(40) 경사와 박씨의 부인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1시간 동안 박씨 부부와 김 경사간의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고 이후 재판과정은 ‘미란다 재판’을 연상케 했다. 재판부는 박씨의 진술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김 경사를 증인석에 세웠다.

―증인, 피고인의 주장이 사실인가요?(박부장판사)

“아닙니다. 박씨의 공범인 김모씨는 이미 심문을 신청한 상태여서 굳이 박씨만 심사를 받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가족에게는 심사 권한을 고지했나요. 기록에는 전화로 통지했다고 돼 있는데….

“기록이 그렇다면 제대로 통지했을 겁니다.”

그러나 곧이어 증인석에 선 부인 박모씨(19)는 “부부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오라는 전화를 한번 받은 적은 있지만 그런 전화는 전혀 못 받았다”고 증언했다.

재판부가 판단을 위해 잠시 휴정을 한 사이 법정 밖에서는 ‘검경 대책회의’가 열렸다. 검사는 김 경사에게 “정말 전화를 했느냐. 기억이 안나면 안난다고 얘기하라”고 다그쳤고 김 경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재판을 속개한 박 부장판사는 “첫 재판부터 일관된 주장을 해 온 박씨 부부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며 박씨에 대한 구속취소를 선언해 박씨를 이날 오후 석방했다. 박씨는 앞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됐다.

▼편의위주 수사관행 제동▼

▽이번 결정의 의미〓박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방어권과 인권보호를 위해 마련된 중요한 권리가 침해됐거나 권리의 행사에 부당한 제한을 받았으므로 경찰이 박씨를 구속한 것은 폭력행위라는 박씨의 죄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가 위법한 행위”라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를 알려주는 것을 한낱 요식행위로 여기는 수사기관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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