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경제-사회분야 '개혁피로' 누적 심각

  • 입력 2000년 5월 24일 18시 51분


‘국민은 피로하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23일 국무회의에서 내각의 분발을 촉구하며 이 문제를 거론했다. 피로감의 실체와 원인에 대한 언급 없이 ‘국정 개혁에 대해 국민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게 발언의 전부였다.


◇관련기사

-[국민 '국정 피로감']무엇이 문제인가


국민은 왜 현 정부의 국정 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을까.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극복해 경제를 본궤도에 올려놓았고 지속적인 ‘햇볕정책’으로 분단이래 첫 남북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왜 지쳐있는 것일까.

이 ‘피로감’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 없이 김대중정권 후반기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이 가능할 리 없다. 국민은 왜 피로한가. 그 답을 유형별로 찾아본다.

▽말만 앞서는 개혁〓교육부는 작년 3월 교육발전 5개년계획 시안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당시 “5월까지 최종안을 확정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최근까지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정년 단축 등에 대한 교원들의 반발이 갈수록 커지자 교육개혁의 속도를 크게 늦춘 것이다.

현 정부의 개혁에 대한 각계의 평가는 대체로 이렇다. 발표만 있고 시행이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국민적 피로감을 가중시킨다는 지적이다.

이세중(李世中)변호사는 24일 “국민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나 말만 많고 결과물이 없는 사례가 많다 보니 모두 싫증을 느끼는 것 같다”면서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토대로 분야별 현안을 제도화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친 선거 집착〓투신권의 구조조정은 1차 공적자금이 투입되던 작년 하반기부터 논의됐다. 그러나 올해 2월 ‘4·13’총선 정국이 본격화되자 정부 여당 주변에선 ‘투신권 구조조정은 없다’는 말이 흘러나오면서 흐지부지됐다. 한 투신사의 임원은 “그 사이 금융감독원 검사만 11차례 받느라 정상 업무가 어려워 회사를 떠난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선거가 끝난 뒤 정부는 투신권 구조조정이 최우선 현안이라며 팔을 걷고 나섰다. 한 증권사의 분석가는 “채권시가평가제 금융지주회사 허용 등도 총선을 앞두고 미뤄놓은 문제”라며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기 위해 모든 개혁일정을 미뤄놓고 이제 와서 다시 개혁타령이니 무슨 개혁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신뢰 잃은 정치〓‘4·13’총선 결과 한나라당이 민주당을 18석 앞서 원내 1당이 되자 김대통령은 즉각 여야 영수회담을 제의했다. 그리고 “국민 대통합과 여야 협력을 통한 상생(相生)의 정치를 펴겠다”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야당과 정국 현안을 풀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약 한달 동안 마찰 없이 지내다 16대 국회 개원일(6월 5일)이 다가오자 민주당은 “실질적인 과반의석 확보가 필요하다”면서 입장을 바꿔 모처럼 조성됐던 유화 정국은 깨질 국면에 처해 있다.

한국여성정치연구소의 손봉숙(孫鳳淑)이사장은 “어제까지 ‘공조 불가’를 외치던 이한동(李漢東)씨를 국무총리로 지명하는 것을 보며 실망을 넘어 허탈감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라며 “정치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는 데 개혁을 따르겠느냐”고 말했다.

▽문어발식 개혁〓김대통령은 취임 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강조했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제2건국운동’을 주창하더니 곧 이어 ‘신지식인 사회 건설’을 새로운 좌표로 설정했고 얼마 전부터는 ‘생산적 복지론’을 펴고 있다.

지난 2년3개월 동안 정부 여당은 이렇게 수많은 국정목표를 제시했다. 5년에 불과한 임기 동안 이를 다 완수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데도 여권은 아랑곳없이 새로운 과제 생산에 주력해 왔다.

자민련 정우택(鄭宇澤)의원은 “현 정권이 그동안 제시했던 개혁과제 가운데 그런 대로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것은 햇볕정책뿐”이라며 “이제 남은 임기 동안에는 재벌개혁 등 소수의 과제를 선정해 힘을 모아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개혁 냉소증〓의약 분업의 경우 여권의 97년 대선공약 사업이었지만 최근까지도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근본 원인은 집단이기주의에 있지만 이면에는 철저한 사전조사와 준비 없이 졸속 추진했던 정부 여당에도 책임이 없지 않다. 투쟁과 대결의 노사관계를 대화와 협력의 신노사관계로 만들어가겠다던 노동정책도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인 세미나를 여는 것 외에 별다른 성과가 없다. 이렇게 캠페인만 있고 실질적인 결과가 없자 사회 곳곳에 개혁냉소 현상이 팽배한 실정이다.

<송인수기자>lissong@donga.com

▼金대통령 발언 속뜻은? 개혁부진 여론에 신속추진 독려인듯▼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국정개혁 피로’ 언급에 대해 청와대는 한마디로 현재 추진중인 각 분야의 개혁을 더욱 독려한 것으로 해석한다.

박준영(朴晙瑩)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일부 여론이 있기 때문에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박수석은 또 “개혁 추진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불안감이 조성되는 것 같으니 이를 투명하고 신속히 처리하고 이를 정확히 알려서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정부가 추진중인 개혁정책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각 경제주체, 국민간의 인식의 괴리에서 빚어진 측면이 많다고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묵기자>ymook@donga.com

▼각계 전문가 진단/"정밀한 개혁청사진으로 국민신뢰부터 회복해야"▼

정치학자와 경제전문가들은 최근 확산되는 국정(國政)피로의 원인을 ‘정밀한 개혁 청사진의 부재’와 ‘의욕과잉’으로 진단하고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의 실천을 통한 ‘신뢰의 회복’을 주문했다. 특히 이들은 정치적 고려 때문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고 원칙이 서면 개혁을 과감히 밀어붙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치학자들은 무엇보다도 국정책임자들의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서강대 손호철(孫浩哲)교수는 “최근 국정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은 한마디로 개혁실종에 따른 실망감과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는 국정표류에 대한 짜증”이라며 “이를 정치기술로 돌파하려 할 것이 아니라 ‘순리’와 ‘원칙’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함성득(咸成得)교수는 “현 정부의 개혁이 절반의 성공이라도 거두려면 산발적으로 던져진 홍보용 개혁과제를 추려 국정목표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며 “임기에 모든 것을 이루려는 욕심을 버리라”고 주문했다.

연세대 장동진(張東辰)교수는 정부의 정책결정과 실행과정의 투명성을 주문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정부가 총선 등을 의식한 ‘정치적’ 경제정책 운용에서 벗어날 것과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안마련을 촉구했다.

이와 관련, 최우석(崔禹錫) 삼성경제연구소장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부실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기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분명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호(李允鎬)LG경제연구원장은 “시급한 과제는 금융불안을 없애는 것”이라며 “투신권 구조조정을 마무리짓고 은행합병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을 제시해야 국민이 안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진영·김두영·선대인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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