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항쟁 20돌]당시 계엄군하사 김효경씨의 통곡

  • 입력 2000년 5월 17일 19시 34분


"동료들의 총을 맞고 숨진 외사촌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80년 5·18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김효겸(金孝謙·43·경기 안양시)씨. 그는 17일 '20년간의 가슴앓이'를 털어놓은 뒤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지…"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저는 공수부대 하사였습니다. 대표적인 양민학살사건으로 꼽히는 '주남마을 버스 총격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부대죠. 그런데 그 사건현장에서 제 외사촌이 총을 맞은 것을 알고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어요."

김씨는 '그 날의 죄책감'으로 인터뷰 도중에도 여러 차례 몸서리를 쳤다.

80년 5월23일 오후 2시경.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 앞길에서 전남 화순 쪽으로 가던 25인승 버스에 수백발의 총탄이 쏟아졌다. 당시 버스에는 화순으로 관(棺)을 구하러 가던 주민 18명이 타고 있었다. 15명은 현장에서 숨졌고 부상한 3명은 부대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주남마을 뒷산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여학생 1명은 곧바로 헬기로 후송됐으나 남자 2명은 리어카에 실린 채 방치됐다.

당시 식량배급을 위해 주둔지에 남아 있던 김씨는 동료가 건네주는 부상자의 주민등록증을 받아들고 눈앞이 캄캄했다. 동갑내기로 고교 시절 한집에서 살던 외사촌(채수길·당시 23세)이 아닌가.

"당시 분위기로는 '이 사람은 내 외사촌'이란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곧바로 후송했더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나중에 부상자 2명이 주남마을 인근 저수지에서 총살당한 뒤 암매장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83년 전역한 김씨는 "지난해 5·18유족회를 통해 외사촌이 행방불명자로 처리된 사실을 알았다"며 "무덤이라도 있으면 술 한잔 따르며 사죄할 텐데…"라고 눈물을 흘렸다.

<광주〓정승호기자>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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