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의 직장풍속도]『윗분이 부르면 겁부터 나요』

  • 입력 1997년 11월 30일 19시 50분


경제난과 기업 구조조정이 몰고온 감원한파가 직장의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 시중은행에서 해외차입 업무를 담당하는 K대리의 퇴근시간은 오전 1시반. 더 근무하고 싶어도 집에 가는 심야좌석버스가 끊기는 시간이 오전 2시이기 때문에 이때쯤 사무실을 나선다. 해외 차입이 어려워져 밤에 할 일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이 없어도 오전 1시반까지는 사무실을 지킨다. 외화 차입실적도 좋지 않은 터에 일도 제대로 안한다는 소릴 듣다보면 머지않아 다가올 금융기관 구조조정과 감원태풍에 자리를 지켜낼 수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최근 은행원들 사이에서는 K대리가 느끼는 것 같은 극심한 감원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명예퇴직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간부사원들은 『윗사람이 부를 때는 겁부터 덜컥 난다』고 입을 모을 만큼 감원공포가 일상화돼 있지만 최근에는 말단직원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기업은행의 한 부장은 『요즘 부하 직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면서 『신세대 직원들이 늘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워지고 한편으론 느슨해지던 근무분위기가 온데 간데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 사흘 걸리던 보고서를 지금은 하루만에 제출할 뿐 아니라 이른바 「칼퇴근」을 하던 직원들도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눈치를 살핀다는 것. 남편과 함께 맞벌이하는 A은행 L대리는 자녀양육문제 등으로 직장을 그만둘 것을 고려해왔으나 최근 직장과 사회분위기 때문에 생각을 완전히 바꿨다. 퇴직을 고려하면서 한동안 느슨해졌던 근무태도도 새롭게 다잡았다. L대리는 『다른 직장에서는 몸이 아파도 근무시간중에는 병원에 가보겠다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까지 들린다』면서 『은행 지점장은 「직위가 높을수록 감원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불안해하는 등 직원 전체가 공포 속에서 지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분위기를 접하다보니 「내 남편도 실직할 가능성이 있다」는 위기감이 현실성있게 다가왔고 이제는 회사에서 등을 떠밀어도 어떻게든 일자리를 지켜야겠다는 게 L대리의 각오다. 〈천광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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