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종교/아가동산 신도생활]언론통제 철저…중노동

  • 입력 1996년 12월 11일 20시 17분


「아가동산」의 신도들은 밖에서 상상할 수 없는 광신적인 집단생활을 해왔으며 교주의 심복들로부터 항상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이곳에서 교주 김기순은 「아가야」로 불리며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해 왔다. 이곳에서는 1년에 서너차례 교주 김기순의 생일 등을 축하하는 광란적인 축제를 가져왔는데 축제 때 모든 신도들은 교주를 향해 『아가야』를 외치는 등 광란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교주는 신도들에게 부부관계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유재산은 일절 인정하지 않고 모두 공동재산으로 귀속시켜 교주가 직접 관리해 왔다. 신도들은 외부와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강요당했다. 외부 출입은 물론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통제됐다. 10여년간 「아가동산」에서 살았던 李春桃(이춘도·53·여·전 논산중 영어교사·대전 서구 도마1동)씨는 「아가동산」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이씨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지난 81년. 교주 김기순에게 포섭된 남편 강활모씨(52·전 논산공고 수학교사)는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아가동산」에 들어가자고 이씨를 설득했다. 이씨는 이 설득에 넘어가 결국 아들 3명과 함께 「아가동산」(당시 에덴동산)에 들어갔다. 이씨부부는 당시 집을 판 돈과 퇴직금 등 3천5백만원을 교주에게 바쳤다. 이씨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아오지 탄광이 따로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아가동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하루 16∼17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레코드판 만드는 일, 과수원 채소밭일 등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작업을 하다가 옆사람과 이야기를 하거나 남녀가 서로 좋아할 수도 없었다. 부부관계를 갖는 것도 금했다. 만약 이를 어겼다가 들키면 감독자에게 얻어 맞든지 일을 더 하든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당했다. 이곳에서는 다치거나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어도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이라며 뜸을 떠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구속된 여신도 정재각(45)은 교주 김기순의 핵심측근으로 신도들에게 정기적으로 뜸을 떠 주는 역할을 맡았다. 할머니 한 명이 뜸 치료를 받다가 질식해 죽기도 했다. 柳眞錫(유진석·22·경기 용인시 수지면 동천리)씨는 어릴 때 부모를 따라 이곳에 들어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씨에 따르면 교주로부터 신임을 받는 사람들(관리자) 수십명이 신도들을 감시하고 감독했다. 유씨는 고교 2학년 방학때 유리하우스를 짓는 작업을 하다가 7m 높이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쳤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망가져버렸다. 이곳 주민들은 30∼80대의 고른 연령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대개 가족단위로 입주했다. 교주 김기순이 81년 「아가동산」을 설립했을 당시 10명 안팎이었으나 이후 소문이 나면서 점점 식구가 늘어나 2백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천〓李明宰·韓正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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