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1호 작곡가 김영남입니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13일 1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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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풍금 연주를 하고  있는 김영남 NK예총 회장
손풍금 연주를 하고 있는 김영남 NK예총 회장


신의주의 압록강변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앉았다. 중국 단둥을 건너다보며 남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

“영남 동지가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 어디든 가겠습니다.”

결혼 뒤 남편은 아내에게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게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가 속고 살았습니다. 남조선에 갑시다.”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마음을 졸이며 숨어살아야 했고, 미얀마 감옥에서 1년 3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남자는 음악가라는 꿈을 쫓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아코디언 교본이 단 한 권밖에 없던 한국에서 9권의 아코디언 편곡집을 펴냈고 탈북민 1호 작곡가로 성장했다.

올해 6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서울로망스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음악회에선 그가 작곡한 노래 6곡이 무대에 올랐다. 자신의 인생이 녹아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NK예총 회장 김영남 씨는 걸어온 60년의 삶을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봤다.

● 병사 작곡가
김 씨는 1962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도 인민위원회 보건처장이었다. 부친은 노동당 간부였다. 1948년에 입당해 전쟁 때엔 면당위원장, 전후엔 도당 조직부에서 일했다. 하지만 전쟁 전에 형이 남쪽으로 간 사실이 밝혀져 당 간부에서 행정 간부로 좌천됐다. 그럼에도 보건처장이란 직책은 꽤 권한이 있어서 가족들은 부친 덕분에 유복한 환경에서 살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김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아코디언 소조에 뽑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1978년 황해남도 주둔 4군단에 입대할 때만 해도 음악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겨진 재능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2년에 한 번씩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중대별로 음악 재능을 가진 병사들을 뽑아 훈련을 시킨 뒤 평양에서 최종 경연을 가진다. 김 씨는 1983년 열린 21차 군무자축전에서 직접 작곡한 중창으로 전군 2등을 했다.

그러자 군단에서 바로 소환했다. 4군단 선전대 소속으로 전문적으로 작곡을 하게 한 것. 군단 선전대는 상좌 계급의 선전대장과 대위 또는 소좌 계급의 작곡가가 지휘관으로 있었다. 그 아래 글을 잘 쓰는 병사들로 구성된 문학창작조와 음악을 잘 하는 병사들로 구성된 음악창작조가 있었다.

선전대에서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가 혁명임무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피아노가 원한다고 아무나 칠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반을 치고 또 쳤다. 얼마 뒤 그는 군단 음악창작조장으로 임명됐다. 물론 작곡한 음악에 대한 최종 승인권한은 군관 신분의 작곡가가 쥐고 있었지만, 병사들도 마음껏 작곡을 할 수는 있었다.

1988년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제대할 때 그는 평양음악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음악대학 학생은 제대군인을 받지 말고 유학생 출신으로 받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10년 동안 군 복무를 하고 오면 기량이 딸려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김 씨는 신의주 제2사범대학 예능학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가니 제대군인들은 의무적으로 예비과 1년을 다니게 했다. 군에서 10년 있다 보면 머리에 녹이 쓸 수밖에 없다며 중학교 졸업한 학생들보다 1년 더 대학을 다니게 한 것이다.

이때 그는 진지하게 자퇴를 고민했다. 대학에 가보니 수준이 너무 맞지 않았다. 예비과를 다녀야 할 학생들은 군에서 5년 동안 작곡까지 하다가 온 자신이 아니라 어린 친구들이었다. 특히 그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 10년 어린 친구들이 몰려와 황홀하게 구경했다. 당시 북한에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퇴하지 않은 이유는 뜻밖에도 대학에서 배우는 정치경제학이나 철학, 심리학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음악만 했던 그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노인들로 구성된 아코디언 동아리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쳐주고 있는 김영남 씨.


● 김정일 집안 가정교사
1993년 대학 5년 과정도 끝나갈 즈음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그를 찾았다. 평안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대장(단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청년기동해설대는 성악, 기악, 화술, 무용 등으로 구성된 25명 안팎의 미혼 전문예술인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사로청에서 발급한 배우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주로 공장이나 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에 나가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그런데 대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장은 엄연하게 북한에서 간부 직책이다. 간부가 되려면 제대군인 출신의 당원에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으면 또 음악을 몰랐다. 그런 점에서 김 씨는 사로청이 찾은 대장 적격자였다.

대학 졸업 전에 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첫해부터 ‘사고’를 쳤다. 1993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경연에서 당당하게 1등을 한 것이다. TV 5대, 6000달러어치의 음향설비, 각종 악기 세트를 우승 상품으로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를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상품을 받아가지고 내려오자마자 그보다 직책이 높은 사로청 고위 간부들이 다 나눠가졌던 것. 그는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최고의 환멸을 느낀 사건은 이듬해에 찾아왔다. 김 씨는 날짜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94년 10월 3일 토요일에 한 농장에서 선전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당 조직부에서 연락이 왔다.

“동무, 오후에 정장을 입고 도당 조직부로 찾아오시오. 좋은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후에 도당에 가니 중앙당 부부장이 앉아있었다.

“우리가 찾던 동무가 이 동무나? 동무는 당이 부르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북한에서 간부로 살려면 이럴 때 답변해야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제가 당의 배려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당이 부르면 어디든 마다하겠습니까.”

“좋소. 집사람은 무슨 일을 하오?”

“도 지방총국 자재상사 통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참 좋은 직업이네. 우리가 동무를 평양으로 소환하려 하는데, 평양에 가면 좋은 집도 있고 피아노도 있고 아무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야. 가서 기다리고 있소.”

김 씨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얼떨떨했다. 마침 도당 조직부에 먼 친척이 있어 그를 찾아가 중앙당 부부장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친척이 그를 불렀다. 그러더니 큰 비밀을 알려주는 듯이 속삭였다.

“네가 장군님 집안 음악 가정교사 후보로 뽑혔어. 신원조회가 끝날 때까지 몇 달 기다려봐.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돼.”

“아니, 나 같은 사람을 왜 장군님 집 가정교사로 뽑아요?”

“외국 유학 다녀오고 실력 있는 애들이야 당연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제대군인도 아니고 노동당원도 아니야. 제일 중요하게는 사범교육도 못 받았단 말이지. 너는 당 간부가 될 조건을 다 갖추고 있고, 게다가 기동선전대장으로 실력도 인정받았잖아. 자제분들 음악 가르치는 게 국제 콩쿠르 입상자 만드는 일도 아니니 충분히 할 수 있어.”

김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매느라 말을 못할 때였는데, 온힘을 짜내 간신히 한마디 남겼다.

“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월남해서 안 돼.”

어머니는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에선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실감이 됐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이 점점 커졌고, 내가 이 사회에서 한계가 있다면 내 자식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절망도 들었다.

2013년 부산에서 진행된 kbs 열린음악회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김영남 씨.
2013년 부산에서 진행된 kbs 열린음악회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 김영남 씨.


● “오늘도 꿈길을 가네”
김 씨의 부친은 1948년에 노동당에 입당한 당원이었고, 모친도 1950년에 입당한 당원이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북한에선 ‘48년 당원’ ‘50년 당원’이라고 부르며 노당원 대접을 해주었다. 믿을 수 있는 충성계층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정환경에 ‘티’가 있으면 절대 어느 정도 이상 승진할 수 없었다.

부모님들은 일찍이 그 현실을 깨달았다. 김 씨가 제대돼 돌아오니 어머니가 저녁마다 한국 라디오를 몰래 듣고 있었다. 김 씨도 호기심에 듣다가 아예 중독됐다.

1989년 결혼해 이듬해에 아들이 태어났고, 4년 뒤 딸도 태어났다. 가정을 이뤘어도 그는 저녁마다 몰래 라디오를 들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는 아내는 그가 라디오를 들을 때면 다른 방에 건너가 모르는 척했다.

라디오를 통해 그는 6.25전쟁이 북한이 선전하는 대로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고, 주체사상에서 선전하는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눈물 같은 건 전혀 흘리지 않았다.

김정일 가정교사 탈락 이후 그는 북한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청년기동해설대 대장 노릇도 더는 하기 싫어 도 직맹위원회 창작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5년부터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아내도 직장을 잃었다. 출근할 곳이 사라지고 장사를 해야 먹고 사는 삶이 시작되지 아내도 변했다. 남편의 권유하자 한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김 씨는 자신의 결심을 근처에 사는 작은 누나에게도 터놓았다. 작은 누나도 오래 전부터 한국 라디오를 들었다. 그의 속셈을 들은 누나 가족도 같이 가자고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한집에 모시고 사는 아버지가 걸렸다. 아버지는 천식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해 함께 데리고 떠나기는 무리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났는데, 탈북을 무한정 미룰 수도 없었다.

라디오를 통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 소식까지 듣자 마음은 더 다급해졌다. 1998년 설을 쇠자마자 그는 마침내 떠나기로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버지, 저의 가족은 남조선에 가기로 했습니다. 작은 누나 가족도 함께 갈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걸립니다. 이제부터 동생네 집에 가서 사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이미 예감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네 결심이 그러하다면 그대로 하라고 지지해 주었다.

김 씨는 한국에 오고 나서 자신들이 떠난 지 1년 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남동생에게 아버지를 맡기고 온 것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통일되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모두 남동생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2년 전 남동생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날 그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 뒤 아내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만 울어요. 지금 8시간째 울고 있는 거 알아요?”

밖을 내다보니 새날이 밝고 있었다. 그는 불효로 우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노래를 작곡했다.

오늘도 꿈길을 가네(김성민 작사. 김영남 작곡)
그리움의 저 하늘 노을보다 불타는 당신의 그 미소는
내 삶의 안식처 내 어린 마음에 이 세상 전부이셨던
사무치게 그리운 사랑하는 내 아버지
기약없이 떠난 자식 가슴깊이 묻어두고
기다리실 당신 그리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아픈 매도 들었고 미운 정도 쌓였던 당신의 그 마음은
내 삶의 안식처 내 가는 이 길이 고향에 닿아있기를
걸음걸음 손잡아 이끄시는 내 아버지
고향으로 가는 그 길 마음으로 열어가리
못다 드린 사랑 바치며 오늘도 꿈길을 가네
2016년 단동에서 압록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강 건너가 김 씨가 나서 자란 고향 신의주이다.


● 7명이 함께 탈북
1998년 1월 21일. 김 씨는 마침내 탈북길에 올랐다. 그와 아내, 8살 아들과 4살 딸. 그리고 작은 누나와 매형, 9살 난 누아의 딸까지 모두 7명이었다.

탈북 경로는 신의주를 떠나 양강도 혜산까지 간 뒤 그곳에서 압록강을 넘을 생각이었다. 그와 작은 누나 가족 모두 너무 가난하게 살지 않았던 터라 점차 몰래 처분했던 재산도 달러로 환전해 품속에 두둑하게 챙겼다.

떠난 순간부터 사고가 터졌다. 체구가 가장 건장한 김 씨가 일행이 가면서 먹을 쌀을 가득 채운 배낭을 멨다.

김 씨는 신의주역에서 일행을 사람들이 빼곡한 기차에 억지로 밀어 넣고 맨 마지막에 열차 승강대에 매달렸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뒤를 돌아보니 젊은 꽃제비들이 쌀 배낭 밑을 면도칼로 짼 뒤 마대에 담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몇 명씩 함께 움직이는데, 일부러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역할이 있고, 배낭을 찢은 뒤 담는 역할이 있으며, 배낭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배낭끈을 손으로 꽉 잡아당기는 역할이 있었다. 만약 들켜도 여럿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때리고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졸지에 떠나자마자 식량을 다 잃었다. 그럼에도 돈이 남아 있기에 믿을 구석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강도 희천에 도착해 혜산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려 하니 20일에 한 번씩 다닌다는 것이었다. 일행은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전식당에 짐을 풀었다. 이곳은 국영식당이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종업원들이 먹고 사는 터전이 됐다. 음식도 팔지만, 숙박을 제공하고 1인당 1시간에 북한돈 2원씩 받았다. 일행이 내야 할 돈은 한 시간에 14원, 하루에 336원이었다. 336원은 옥수수 8㎏ 정도 살 수 있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며칠 식당에 있으면서 식당 종업원들과 친해졌다. 이들 중 한명의 고향이 자강도 위원군이었다. 만포 아래에 위치한 위원엔 압록강을 막은 댐이 있는데, 압록강 옆 도로는 호수를 끼고 구불구불 길어졌다. 겨울이면 위원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를 질러가는데 이럴 때 중국 땅도 경유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듣자 김 씨는 굳이 혜산까지 힘들게 가지 않아도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노선을 변경했다. 언제 올지 모를 혜산행 열차를 포기하고 만포행 열차를 타기로 했다.

며칠 만에 들어온 열차는 지붕까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비닐도 쳐있지 않은 열차 창문엔 군인들이 걸터앉아 돈을 준 사람을 안으로 끌어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있는 김 씨 일행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주고 열차에 탔다.

열차 내부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해 일단 타면 서있는 자세조차 바꾸기 어려웠다.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어 생리적 욕구는 선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열차엔 악취가 가득했다. 이들이 타고도 8시간이 지나서야 열차는 서서히 만포로 떠났다.

2018년 한국문화예술인협회 송년의 밤 행사에 참가한 김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송해 선생과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 심양에 정착하다
만포에 도착하자마자 했던 일은 위조 공민증(주민등록증)을 사는 것이었다. 압록강 옆 도로에는 단속 초소들이 많아 외지 공민증으로는 통과할 수 없었다. 당시엔 국경 옆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위조한 공민증도 장마당에서 1000원에 팔렸다. 공민증을 사다가 안전원에게 걸려 끌려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마침 안전원이 고향사람이라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위조 공민증 2개를 품고 이들은 위원으로 향했다. 만포에서 위원까지는 70리였는데, 중간에 얼어붙은 호수에 올라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이 계획이었다.

여러 초소를 어찌어찌해 통과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인 오후 6시쯤 다시 단속초소와 맞닥뜨렸다. 앳돼 보이는 군인 한 명이 공민증을 보자고 요구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살갑게 다가가 위원 사람이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자, 그 병사는 총을 옆에 놓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참을 먹는데, 소대 초소 쪽에서 밥 먹으러 오라는 고함소리가 날아왔다. 6시부터 7시까지 식사 시간이었는데 이때는 경비대원 모두가 철수해 밥 먹으려 간다. 밥이 적으니 교대 식사라는 법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경비가 나오는 7시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았다.

김 씨 일행은 군인이 사라지자마자 압록강으로 내려가 얼음 위를 내달렸다. 마침 날이 어두워져 발각되지 않았다. 한참을 내달리니 벌거벗은 북한 민둥산이 아닌 울창한 산이 앞에 나타났다. 중국에 도착한 것이다.

일행은 산에 올라가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밤을 꼬박 새고 일어나 주변을 살피니 바로 위에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집에 가서 살피니 젊은 한족이 나무를 패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배워둔 중국어가 이때 요긴했다. 북에서 왔으니 좀 재워달라고 하자 한족 청년은 100달러를 요구했다. 다음날 그는 일행을 마을로 데리고 가 조선족 할머니 집으로 안내했다.

말이 통하는 노인을 만나니 눈물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할머니는 “김정일을 압록강에 처넣고 오지 왜 그냥 왔냐”며 인민들을 굶겨 죽이는 북한 당국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 할머니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들은 3일 뒤에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에는 찾아갈 사람이 있었다. 신의주에 살 때 한 친척이 무역거래를 했는데, 그 대방이 심양에 살았다. 김 씨는 떠나기 전 그의 주소를 외워두었다.

그 사람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자, 잠시 당황했던 그는 여기저기 수소문해 한국 목사를 찾아 연결했다. 당시 선교로 중국에 파견돼 있던 주계명 목사가 이들을 맞았다. 그는 이들 가족에게 숨어 살 집도 찾아주고, 한국 기업에서 일감도 따올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중국에서 온가족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인 주계명 목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최정숙 사모(앞줄 맨 왼쪽). 3년 전 찍은 사진이다.


● 미얀마에서 1년3개월 감옥 생활
그렇게 심양에 정착한 이들은 3년을 이곳에서 지냈다. 주 목사가 생활비와 집세, 아이들 학비까지 대주는데다, 어른들이 어느 정도 일도 하니 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 수는 없는 법. 목적지인 한국으로 가려니 길이 없었다.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게 돼 마음도 안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불안한 신분으로 중국에 있을 수는 없었다.

김 씨는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지도 한 장에만 의지해 동남아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면 방법이 생길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엔 동남아나 몽골을 거쳐 한국에 오는 탈북 루트가 없을 때였다. 그만큼 국경 경비도 허술했다. 쿤밍을 경유해 미안먀 북부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군인들에게 체포돼 구치소로 끌려가게 됐다. 그 지역은 군수, 도지사까지 모두 군인이었다.

김 씨는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왔는지 알지 못했다.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미얀마 북부는 세계 아편 재배의 주요 산지였다. 이곳을 25년 동안 장악하며 한때 미국 헤로인 공급량의 70%를 차지한다는 말이 나왔던 마약왕 쿤사가 1995년에 항복하면서 이곳엔 정부군이 들어왔다.

몇 년 뒤부터 쿤사의 잔존 세력이 중국 삼합회와 손을 잡고 다시 골든 트라이앵글을 지배하고 아편을 재배하면서 이곳은 탈북자를 잡아먹는 ‘버뮤다 삼각지대’가 되고 말았다. 극소수 목격자에 따르면 미얀마 북부를 통해 중국을 빠져나오다 범죄조직에 체포된 탈북민은 이곳에서 노예가 됐다. 이들은 깊은 웅덩이에 갇혀 있다가 낮에는 족쇄를 차고 총구 앞에서 아편재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직접 들어가 조사해 본 사람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김 씨가 체포될 때는 다행히 군부가 일시적으로 북부를 다스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시스템이 제대로 되지 않아 김 씨 가족은 남녀가 따로 갈라져 구치소에서 9개월을 보내야 했다.

이들은 중국의 주 목사에게 도와달라고 연락했고, 주 목사가 미얀마 주재 한국대사관에 연락을 하는 등 여기저기 뛰어다녀봤지만 도움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9개월 뒤 이들은 다시 감옥으로 옮겨가 7개월 남짓을 더 보냈다. 김 씨는 감옥에 갇힌 아이들이 미얀마 말을 알아듣고 군인들과 대화가 되자 큰 불안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여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국대사관에서 이들을 데리려왔다. 대사관에 연락을 한지 8개월 만이었다. 2002년 5월 마침내 김 씨 가족 7명은 한국에 도착했다.

2018년 부인의 생일에 온 가족이 함께 모였다. 8살, 4살 때 탈북한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 “선생님을 초빙합니다”
2002년 8월 김 씨는 가족과 함께 서울 양천구에 임대주택을 받았다. 모든 탈북민들이 그러하듯이 김 씨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이었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우유대리점에 취직해 6개월 동안 일했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그는 북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피아노를 쳤던 경험을 되살려 피아노 수리공이 되려고 조율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그리고 낙원악기상가 피아노대리점에 취직했다.

악기상가에는 그가 구경도 못했던 악기들이 즐비했다. 어느 날 아코디언 매장에 들려 연습 삼아 연주를 했는데, 여사장이 그의 연주를 가만히 지켜보다 말했다.

“선생님. 그 정도 실력이면 피아노 수리하지 말고 아코디언만 가르쳐줘도 돈을 벌 수 있어요.”

그 말에 희망을 가진 김 씨는 한국 아코디언 실태를 연구해보기 시작했다. 그가 봤을 때 한국 아코디언의 수준은 북한의 1960년대 수준보다 못했다. 교본도 전국에 단 한 권밖에 없었다.

“한국은 다 발전된 줄 알았는데 아코디언은 정말 인기가 없구나. 그렇다면 내가 아코디언이란 시장을 한번 개척해보자.”

그는 큰맘을 먹고 6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탈리아제 아코디언을 샀다. 두 달 정도 열심히 훈련을 하니 10여년 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광고를 해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두세 명의 학생이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연주를 찍어 자주 인터넷에 올렸다.

2005년 어느 날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는 뮤직필드라는 연주 강의 사이트인데요. 선생님을 초빙하고 싶어 전화했습니다.”

그것이 김영남을 한국에 알리는 시작이었다. 뮤직필드에서 김 씨는 76개의 아코디언 연주 강의를 제작했다. 강의를 하려니 교본이 없어, 스스로 각종 곡을 아코디언 연주에 맞게 편곡해야 했다.

각각 100곡씩 수록된 김영남 아코디언 명곡집 1,2권이 그렇게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그는 수백 곡의 가요를 아코디언에 맞춰 편곡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9권의 편곡집을 냈다.

뮤직필드를 보고 전국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

6월 3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제1회 김영남 음악회의가 열렸다.
6월 3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제1회 김영남 음악회의가 열렸다.


● 성공한 인생
아코디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목표도 점점 높아졌다. 2006년 그는 북에서 25명으로 구성된 도급 청년예술단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2006년 평양예술단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사회적 기업인 NK예총도 만들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그는 18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북한 예술을 알렸다. 동시에 그와 가족들도 한국에 잘 정착했다. 서울에 번듯한 집도 장만했고, 아내는 재가요양복지센터 센터장이 돼 노인복지에 전념하고 있다. 아들도 올해 경력 7년차의 회사원이 돼 성실하게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고, 딸도 공기업의 정규직 조리사로 성장했다.

작은 누나 가족은 2010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탈북민 신분이 아닌 한국인 신분으로 당당하게 영주권을 받고 현지에 잘 정착했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잘 정착했지만, 김 씨의 마음에는 늘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있었다.

“어찌되다 보니 아코디언 연주가로 알려졌지만, 실은 작곡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코로나로 활동이 중단되자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 작곡에 매진할 시기라고 판단한 그는 예술단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6개의 곡으로 올해 6월 제1회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탈북 예술인들이 아닌 서울대 음악대학과 유수의 해외 음악 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함께 연 음악회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 3가지 꿈이 있다고 말했다.

“우선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편곡을 계속 할 겁니다. 한국 아코디언의 기술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는 그가 지금도 종로에 허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아코디언 학원을 유지하며 제자들을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칠맛 나는 김영남만의 주법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 수많이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목표는 세계가 인정하는 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제 욕심이겠지만, 그래도 탈북자라는 신분을 넘어 세계에 대한민국 음악을 알리는 당당한 음악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회를 연 이유였다. 앞으로 그는 음악회를 2회, 3회로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세 번째 목표는 탈북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20년 넘게 살아오면서 정말 행복했고, 후회가 없었고, 또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탈북민은 정착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저는 잘 살았지만 저만 잘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김 씨는 해외에 음악 유학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삶을 돌아보면 그는 K팝의 원조 대한민국에 유학이 아닌, 음악인으로 당당히 정착했다. 그의 인생은 성공이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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