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갑자기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대표로 하는 한미 워킹그룹 출범을 발표하면서 이 조직의 역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상 주요 비핵화 이슈는 한미 양국이 동시에 발표했던 관례와 달리 이번엔 국무부가 먼저 발표한 만큼 워싱턴이 의지를 갖고 만들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은 공식적으로는 비핵화 협상을 조율하고 실무를 다룰 협의 시스템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뤄져온 비핵화 논의의 세부사항을 채워가며 이행 조치에 속도를 내겠다는 것. 하지만 비건과 이 본부장은 최근 석 달간 이미 14차례나 만나며 별도 조직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주 접촉해왔다. 그래서 일각에선 또 다른 조직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 과속을 견제하고, 이를 통해 대북 협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트럼프의 의도가 담겼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 정작 급한 북-미보다 한미 먼저 워킹그룹
한미 워킹그룹은 비건과 이 본부장을 축으로 지금까지 비핵화 협상에 참여해온 당국자들을 중심으로 멤버를 구성하되 향후 분야별 소그룹을 만들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외교부를 중심으로 하되 통일부를 비롯한 다른 부처 관계자들도 필요에 따라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미 측에서는 알렉스 웡 국무부 부차관보와 대북 담당인 마크 램버트 동아태 부차관보 대행, 국제안보비확산국(ISN) 내 검증·사찰 담당자들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에서는 앨리슨 후커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보좌관이 명단에 들어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31일 정례브리핑에서 한미 워킹그룹의 성격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 전반에 대해 한미 사이에 더욱 긴밀한 논의를 위한 기구로 안다”고 밝혔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현재의 양국 논의를 정례화,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이 시점에 워킹그룹을 새로 구성하는 이유에 대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 준비의 세부 내용은 한미가 아니라 북-미가 워킹그룹을 꾸려 논의해야 할 사안. 막상 북-미 워킹그룹은 7월 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3차 방북에서 “북한과 합의했다”고 밝힌 이후 4개월째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후 비건 대표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과의 만남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 남북관계 속도 조절용 견제장치인 듯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과의 워킹그룹을 만들려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팰러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정례브리핑에서 밝힌 워킹그룹의 4가지 의제는 △한미 간 외교 공조 △비핵화 노력 △대북제재 이행 △유엔 제재를 준수하는 남북협력이다. 제재 관련 비중이 절반을 차지한다.
비건 대표가 워킹그룹 구성에 나선 또 다른 배경엔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대북 관련 정보를 원한다는 속내도 깔려 있다. 청와대가 남북관계나 평화 구상을 주도하는 가운데, 미 국무부가 한국 정부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는 말도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북핵 협상을 주로 맡게 된 국무부가 외교부는 물론이고 비핵화, 남북관계 분야에서 청와대, 통일부와도 소통하자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비건 대표가 이 본부장과 미국에서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돼 방한해 2박 3일간 두 차례 청와대를 찾은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비건 대표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에 이어 지난달 30일에는 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평양정상회담을 수행했던 윤건영 국정기획실장도 비공개로 면담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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