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성규]헌법재판소와 촛불의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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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기사들을 최근 다시 들춰봤다.

 “전문의 오연상 씨는 당시 ‘박종철 군은 바지만 입은 채 웃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 7면 보도)

 “고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에 가담한 고문 경찰관이 3명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동아일보 1987년 5월 22일 1면 보도)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쇼크사했다’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에게 가해진 참혹한 고문 실태는 일련의 보도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강민창 치안본부장),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때리느냐”(정호용 내무부 장관)는 말들도 허무맹랑한 거짓말임이 들통났다.

 대학생 형과 누나들이 왜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는지, 그들을 쫓는 경찰들이 왜 그리도 최루탄을 쏘아댔는지 몰랐던 까까머리 중학생을 일깨워줬던 기사들이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은 그렇게 타올랐다. 5공 정권의 호헌 호통도 통하지 않았다. 6·29선언은 사실상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국민 93.1%의 지지로 개헌이 이뤄졌고, 대통령 선거권은 다시 국민에게 돌아왔다. 9차 개헌 이야기다. 헌법재판소도 그때 생겨났다. 지금의 헌재 역시 민주화의 상징인 셈이다.

굳이 29년 전 신문 기사까지 들춰낸 이유는 시민의 힘으로 만든 헌법재판소가 이제 다른 변혁의 한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두 번째 탄핵심판을 맡아 어떤 결정을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돼 있다.

 그런데 그 관심이 너무 지나치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헌재 앞에 수많은 태극기가 펄럭였다. 또 얼마 안 지나선 촛불이 헌재 앞을 메웠다. 커다란 스피커를 대형 크레인에 매달아선 쩌렁쩌렁 구호를 외쳐댔다. “탄핵 무효” “신속 탄핵”…. 저마다 자신들의 요구를 외쳐댔다.

 오전에는 근처 대학에서 토플을 보던 수험생들이 못 참겠다며 시험을 포기했다. 또 오후에는 주말도 잊은 채 나왔던 헌법재판관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입에서는 “너무 시끄럽다”는 푸념까지 흘러나왔다고 한다. 촛불집회 현장 한쪽에서는 헌법재판관에게 연하장 보내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최근 헌법재판관을 응원하는 웹사이트가 생겨났다가 폐쇄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재판관들에게 신속한 탄핵 결정을 촉구하겠다는 의미로 만들었지만, 탄핵 반대 메시지가 한꺼번에 몰렸다. 트래픽 공격까지 받은 끝에 개설 이틀 만에 사이트가 폐쇄됐다. 

 엄연히 사법 영역인 헌재를 향한 이런 과도한 관심 표명이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심판에게 서로 ‘우리 편을 들어 달라’고 조르는 격이다. 심판은 항상 공정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심판을 세워선 안 된다. 그래야 무결점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상대방을 결과에 승복하도록 하는 것도, 공정성이 보장된 결론이라는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한 일이다.

 헌법재판관들이 집회 소음에 기록 검토조차 못 하겠다는데, 신속하고 바른 결론을 내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촛불 행렬이든 태극기 행렬이든 광장 안에 머물고 있을 때 가장 설득력이 높았다. 그게 지금까지 평화집회를 지켜온 성숙한 시민 의식이다. 29년 전 그때와 달리 이젠 최루탄도 없고, 화염병도 없다. 신속한 탄핵심판 결정을 요구하는 집회라면 이젠 볼륨을 줄여 놓아도 좋다. 

홍성규 채널A 사회부 차장 hot@donga.com
#6월 민주항쟁#헌법재판소#탄핵#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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