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외교관 <파견 주재관…해외공관 개혁 무풍지대

  • 입력 2008년 5월 24일 03시 02분


《“실제 일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낸다기보다는 좋은 자리를 뺏기지 않고 인사 숨통을 틔우는 데 치중하다 보니 제도 운용에 탄력성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해외주재관 근무를 마치고 최근 귀국한 A 씨)

미국 워싱턴에는 한국 정부 소속 공무원이 100명(지원요원 제외) 넘게 근무한다. 하지만 이들 중 외교통상부 소속 외교관은 27명(대사 제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정부 각 부처에서 보낸 국장∼과장급 해외주재관(직무파견 형식 2명을 포함해 총 27명) △국방부 무관(16명) △국가정보원 소속 요원 △옛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등에서 보낸 국제기구 파견 직원 등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식 외교관보다 다른 부처 주재관이 더 많은 것은 한국 공관만의 독특한 현상 같다”(전직 미 국무부 간부)는 얘기마저 나온다. 실제로 상당수 다른 선진국은 대체로 외교관 대 주재관 비율이 2 대 1이나 3 대 1 정도다.》

이명박 정부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15개 부(部) 체제로 조직을 줄인 지 3개월가량 지났지만 해외 공관은 ‘무풍지대’로 남아 있다.

23일 현재 주미대사관엔 국방부와 국정원을 제외하고도 20개 부처와 국회, 대법원 등 총 22개 기관 출신 주재관이 있다. 본국의 정부 조직은 줄었지만 해외엔 이미 사라지거나 통폐합된 부서 출신 주재관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해외공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 관계자는 23일 “부처 통폐합에 따른 주재관 조정 작업을 하고 있지만 (부처 간 이견 등으로)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 공관에 간부급 자리를 늘리려는 각 부처의 로비와 압력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는 출범 초기인 2003년 206명에서 말기엔 265명으로 늘어 큰 폭의 증가를 보였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국민의 해외여행 및 유학 급증에 따른 영사 서비스 수요 급증, 한류 확산을 지원하기 위한 문화외교, 자원 확보 및 수출 증진 등을 위한 것”이라며 주재관을 증원했다.

물론 상당수 주재관은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외교의 일익을 담당한다. “무조건 줄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옥석을 가려 더 필요한 곳은 과감히 늘려야 한다”는 게 외교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니 주재관의 근무 태도와 실적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한 전직 외교관은 “3년 내내 한 일이라곤 윗사람과 소관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 영접·안내가 거의 전부였던 사람이 있는 반면 세미나를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최신 동향을 본국에 전해 주고 단단한 네트워크를 쌓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해외주재관 증원에 대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과 외교부의 견제가 심해지자 일부 부처는 ‘직무파견’ 형식으로 주재관을 늘리고 있다. 해외주재관은 2006년부터 형식상 공모를 통해 선발하며 파견 기간 중 신분과 예산이 외교부 관할로 바뀌지만 직무파견은 예산과 소속이 원래 소속 부서 그대로다.

주재관들은 봉급 외에 배우자 수당을 포함한 체재비, 주택보조비 등 일반 외교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는다. 대사관에 개인사무실도 주어진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한국의 국력에 비춰볼 때 주재관을 많이 내보내는 게 재정상으로 큰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일’이 아니라 부처 이기주의 차원의 구시대적 발상이 계속 합리적 인적 자원 배분을 방해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주재관 제도를 ‘자리 늘리기’의 발상으로 접근하는 부처들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실제 일이 있는 곳 대신 근무여건이 좋은 곳 위주로 배치가 이뤄지는 경향이 남아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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