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서해교전 무시하고 방북협상 요청”

  • 입력 2007년 7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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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처드 소장의 회고록 ‘실패한 외교’.
프리처드 소장의 회고록 ‘실패한 외교’.
美 프리처드 前 대북특사가 본 ‘2002년 남과 북’ 회고록 ‘실패한 외교’ 출간

《미국 내 대표적인 대북(對北) 포용론자인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이 백악관과 국무부에서 직접 보고 들은 한반도 관련 비화를 ‘실패한 외교(Failed Diplomacy)’라는 책으로 펴냈다. 올해 5월 출간된 이 책은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비극적 이야기’라는 부제(副題)가 말해 주듯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처음부터 적극적인 대북 협상에 나서지 않아 초래된 오늘의 상황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서 북한 문제를 다뤘지만 민주당원이 아니다. 또 부시 행정부 시절엔 국무부 대사직까지 지냈으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도 거리가 멀다. 그의 회고록 중 한국과 관련된 중요 부분을 살펴본다.》

▽한국 정부, “서해교전 무시해 달라”=2002년 6월 29일 서해교전이 발생한 직후 김대중 정부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 “(그 파장을) 무시하고(ignore), 7월 10일로 예정된 미국 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예정대로 추진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프리처드 소장은 밝혔다. 그는 “독자들에게 2002년 당시 한미 관계가 얼마나 기괴했는지(bizarre) 이해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비화 공개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증언은 북한 경비정이 서해상 북방한계선(NLL)을 불법으로 넘어와 무력도발을 하는 바람에 한국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는 비극이 발생했음에도 김대중 정부가 북-미 관계 개선에만 주력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를 대표로 하는 협상단을 7월 10일 평양에 보내기로 북한과 합의한 상태였다. 이른바 ‘대담한 조치(Bold Approach)’로 불리는 북-미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언론 발표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처드 소장은 미국이 방북을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7월 1일 이를 평양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서해교전에 따른 한국 내 여론 악화 및 그해 여름 미국이 파악한 북한의 비밀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부시 행정부에 서해교전을 무시하고 방북 협상을 예정대로 진행해 달라고 촉구한 것은 서울(한국 정부)이었으며, 오히려 부시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주의를 당부했다(cautioned)”고 납득하기 어려운 그 무렵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의 카운터파트에 ‘ 한국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해 줬다”고 했다.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한일 월드컵 결승전 및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했다. 프리처드 소장은 “예상대로 여론이 나빠졌다”며 “미국 정부의 방북 연기는 옳은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당시로서는 미국이 한국과 북한의 HEU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강석주의 HEU 시인=그는 3개월 뒤인 10월 3일 켈리 차관보 등과 함께 미 군용기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외교 실세인 강석주 제1부상을 만났다.

켈리 차관보는 3일 HEU 의혹을 제기했으나 4일 오전까지도 김 부상은 “미국의 조작”이라며 부인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나타난 강 제1부상은 달랐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그는 “강 제1부상은 (전날) 보고받은 뒤 인민군 지휘부 및 군수책임자와 이튿날 새벽까지 논의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그는 HEU 존재를 시인했으나 구체적인 표현은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 제1부상은 “우리는 (부시 대통령이 2002년 1월 국정연설에서 발언한 대로) 악의 축(axis of evil)이고, 미국은 신사다. 이게 북-미 관계다. 우리는 신사처럼 대화할 수 없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무장을 해제한다면 유고슬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맞아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이 HEU 정보를 공론화한 뒤 압력을 가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고 프리처드 소장은 회고했다.

▽북한의 HEU 시인 이후=‘강석주의 HEU 시인’을 워싱턴에 보고하는 데는 평양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안 통신채널을 활용했다. 그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를 단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2대를 타고 영국대사관으로 이동했다”고 했다.

당시 방북 협상단 8명 가운데 3명은 한국어가 유창했다.(부인이 한국인인 데이비드 스트로브 국무부 한국과장, 한국계로 당시 6년차 외교관이던 줄리 정, 미 정부의 한국어 통역을 맡아 온 김동현 씨가 이들이다)

그는 “세 사람은 북한 측 영어통역에게 들은 말 대신 자신들이 들은 한국어를 복기해 강 제1부상의 발언을 보고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으로 전송됐다.

그러나 영국 외교부 채널을 통해 평양에서 워싱턴으로 전문(電文)을 보내는 것은 전 세계 영국 공관이 이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대표단은 몰랐다.

그는 “워싱턴의 영국대사관이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인편으로 보고서를 전달하기도 전에 보고 내용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고 말했다. 강경파인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파월 장관보다 먼저 보고서를 받아 봤다.

미 협상단이 평양을 떠나 한국 오산 공군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온 미 공군 대령조차 ‘북한의 HEU 개발 시인’ 소식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국무부 공식채널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전달받지 못한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의 심기가 좋을 리 없었다”고 술회했다.

▽초기부터 삐걱거린 한미 관계=부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2001년 1월 전화통화는 북한 문제로 어긋나 버린 한미 관계의 앞날에 대한 예고편이었다.

2001년 1월 21일 취임한 부시 대통령은 취임 직후 몇몇 정상과 전화외교를 시작했다. 캐나다 멕시코 등 인접국이 1차 대상이었고, 한국 일본 영국 등 동맹국이 그 다음이었다. 프리처드 소장은 “김 대통령과의 통화는 꽤 빠른 편인 2월 초 성사됐다”고 썼다.(청와대에 따르면 실제 통화는 1월 25일 이뤄졌다)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던 프리처드 소장은 직접 부시 대통령을 위한 ‘말씀 자료’를 준비했고 통화할 때 배석했다.

“김 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의 필요성을 길게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이 불편한 듯 수화기의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린 채 ‘이 사람 누구냐. 이렇게 뭘 모르다니 믿을 수 없군(Who is this guy? I can't believe how naive he is)’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날 상급자로부터 ‘김대중은 누구인가’라는 보고서를 써서 이튿날 출근 전까지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고 오후 11시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김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경력, 대통령 당선 과정, 햇볕정책, 노벨상 수상 이력 등을 담은 자료를 만들어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는? 프리처드 소장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부시 대통령의 (북한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 대통령에 대한)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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