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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2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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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이 올해 10월 핵실험 직후 향후 국가정책의 중점 방향을 이같이 제시한 사실이 밝혀졌다. 잦은 수해와 극심한 식량난으로 점증하는 내부 불만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본보는 최근 핵실험 직후 북한 노동당이 작성한 16쪽짜리 ‘간부 및 군중 강연자료’(사진)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문건은 평소 자주 북한을 드나드는 한 인사가 북한 노동당 간부에게서 직접 건네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핵시험(핵실험) 성공은 반만년 민족사와 세계 정치사에 특기할 력사적(역사적) 사변이다’라는 제목의 이 문건에는 북한이 핵을 바라보는 시각과 개발 동기, 앞으로의 대책과 대내 선전용 주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는 경제건설에 매진할 때=북한은 올해 10월 9일의 핵실험 성공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려명(여명·黎明)’으로 평가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미국의 위협에서 벗어난 만큼 이제는 경제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북한은 문건에서 “(그동안) 막대한 인적, 물적, 지적 자원이 여기(핵 개발)에 집중됐다”며 “이번 핵실험으로 생존 위협을 제거한 만큼 앞으로는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핵 개발에는 3억 달러가량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건은 ‘조선은 핵 개발 성공으로 재래식 무기에 대한 투자를 크게 줄여 이 돈을 경제발전에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중국 신문 ‘청년참고’의 글을 소개하면서 “참으로 휘황한 강성대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인민들을 고무했다.
문건은 또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숨죽은 공장, 꺼져버린 수도의 불빛, 멈춰선 렬차(열차)들을 뒤에 두시고 선군(先軍)의 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며 자위적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심혈을 다 바치었다”며 산업 붕괴와 주민의 생활고를 합리화했다.
문건은 이어 “언젠가 막대한 자금을 국방력 강화에 돌리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나는 인민생활이 어려웠지만 군수공업에 언제나 큰 힘을 넣어왔다. 이에 대해 앞으로 우리 인민이 반드시 리해(이해)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핵무기 개발 왜 했나=문건은 “수십 년 동안 특히 최근 미제의 핵전쟁 위협이 가중되고 극악한 제재압력 책동으로 우리 국가의 최고 리익(이익)과 안전이 엄중히 침해당했다”며 “우리가 핵실험을 하게 된 것은 미국 놈들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7월 5일 북한이 정상적인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미사일을 발사했음에도 ‘강도적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채택으로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으며, 북한의 경제를 질식시키기 위한 제재 봉쇄를 강화해 방관할 수 없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북한은 문건에서 핵실험 성공은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위한 강력한 무기를 마련한 민족사적 사변이며 △조선반도(한반도)와 세계평화를 도모하고 세계 자주화 위업을 힘 있게 고무하고 추동한 인류사적 사변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문건은 이어 “앞으로 미제가 우리를 제재할 수 있다”고 전망한 뒤 “하지만 이는 ‘달 보고 짖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선군 혁명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갈 것”이라고 말해 설령 정책의 중점을 경제발전에 두더라도 ‘선군 정치’의 기본 노선이 바뀌지는 않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북한 핵 포기 절대 쉽지 않을 듯=북한이 느끼는 미국의 대(對)조선압살정책이 완전히 제거되거나 미국과 북한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는 한 북한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지도부가 핵무기만이 국가와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음이 문건을 통해 명확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건은 “생존한 다음 발전이 있는 법이지, 발전했다고 생존하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한 뒤 “강성대국의 려명은 핵 섬광에서 온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건은 또 “핵무기를 가지려면 (핵무기를 가진) 대국의 광란적인 정치, 외교적 압력과 악착같은 경제봉쇄를 이겨내야 한다. 무력 침공도 각오해야 한다”며 “핵무기 보유의 길은 핵 열강과 추종세력의 ‘모두 매(뭇매)’를 각오해야 하는 사생결단의 길”이라고 말해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다.
문건은 이어 “북조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여방식은 (핵실험이 성공한) 10월 9일을 경계로 해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며 “이는 지난 시기 우리 공화국을 압살하려던 적대세력들이 좋든 싫든 조선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국제사회에 핵보유국 지위를 요구할 것임을 내비쳤다.
문건은 또 “미국, 일본, 남조선이 핵실험과 관련한 정세를 더 악화시킨다면 앞으로 경제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만큼 북조선과 손을 잡고 공정한 거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차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엄포성 경고’로 읽힌다.
문건에서 나타난 북한의 이 같은 시각에 비춰볼 때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이끌어내는 데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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