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 예비역중위 별세

  • 입력 2006년 11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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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아온 사자(死者)입니다.”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한 뒤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던 ‘첫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사진) 씨가 19일 지병으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4월에만 해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위원회 합동청문회에 나가 “북한에 있는 540여 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호소했던 그였다. 이후 7개월 사이 암과 뇌중풍(뇌졸중)이 조 씨의 몸을 덮쳤지만 고인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귀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연세대 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에 소위로 자원입대했던 그는 1951년 8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가 됐다.

북한의 전향 회유를 끝내 거부하자 1952년부터 그는 북한 내 악명 높은 덕천, 서천, 함흥 등지의 노동교화수용소에서 12년 6개월간 갇혀 지냈다. 고인은 다시 13년간 구리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규폐증 판정을 받고서야 탄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고인은 1994년 10월 3일 뗏목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했고, 중국 어선을 타고 20일 뒤 한국 땅을 밟았다.

귀환 직후 병상에서 이병태 당시 국방부 장관을 맞은 그는 “육군 소위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잊었던 ‘조국’을 울렸다.

고인은 그해 11월 육군사관학교에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전역했다. 1995년 윤신자(66) 씨와 결혼했고 같은 해 모교에서 학위도 받아 대한민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을 다시 찾은 듯했다.

그러나 고인은 안락한 생활에 머물지 않고 정부가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침묵할 때마다 집회 등에 참여해 정부에 적극적인 대책을 촉구해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 씨가 있으며 북한에서도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조창호 중위의 장례식은 재향군인회의 첫 향군장(鄕軍葬)으로 21일 오전 7시 반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치러진다. 시신은 화장돼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의 영현봉안시설(납골당)인 충혼당에 안장된다. 031-787-1503

성남=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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