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발레리 수히닌 副대사께

  • 입력 2006년 8월 12일 03시 01분


주한 러시아연방 대사관 발레리 수히닌 부(副)대사께.

그제 저녁, 처음 뵙는 자리였지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30년 넘게 한반도만 담당해 오셨다죠. 그래도 부대사께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까지 인용할 때는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의 한국학 전통이 깊고, 수준도 높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 자리였습니다.

20일 모스크바로 귀임하신다죠. 평양 주재 대사로 내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로우실 것이라 짐작됩니다. 러시아 외교관들의 정년이 60세라고 하셨으니까 ‘67학번’이신 부대사께서는 북한 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치게 되겠죠.

기자의 직업적 습관으로 부대사님의 모스크바 집 전화번호를 묻자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2001년 7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때를 얘기하시면서 밤늦게 불쑥 남의 집에 전화를 걸곤 하는 남북한 사람들의 ‘마른 성미’를 지적하셨죠.

당시 김 위원장의 실제 방문 기간이 24일이나 되는데도 북한 외교관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박 ○일’이었으니 우리 장군님의 공식 방문도 ‘○박 ○일’로 발표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얘길 듣고 쓴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수히닌 부대사님,

부대사께서 평양에 재임하는 기간은 아마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 정세의 중요한 고비가 될 듯합니다. 군더더기 말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잘 아실 겁니다. 어느 나라나 재외공관장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분명하겠지만, 저는 부대사께서 한반도에 대한 마지막 애정의 불꽃을 태워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아직도 문명사회로부터 ‘초현실주의 사회(Surrealistic Society)’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소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어제 특별성명을 통해 국민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부패독재체제(Kleptocracy)’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세상은 물론 자연의 법칙까지 거슬러 가고 있는 김정일 정권이 핵심 타깃 중 하나입니다.

김정일 정권의 초현실주의는 안으로는 부패독재체제, 밖으로는 ‘치명적 기생정권’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에서는 기생자-숙주(宿主)의 사이에 ‘자연선택’이라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치명적인 기생 생물은 숙주를 죽이고 결과적으로 자기도 소멸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선택이 일어나 기생자도 살고 숙주도 사는 길을 따르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김정일 정권은 한국과 중국을 숙주로 삼아 개체를 유지하고 있는 기생체제입니다. 하지만 김정일 정권은 자연선택 대신 숙주를 죽이고 결국 자기도 절멸(絶滅)할 수밖에 없는 반(反)자연적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덩치가 작은 숙주일수록 치사율이 높습니다.

평양에 계시는 동안 기회가 닿는 대로 그런 세상의 공법(公法), 자연의 이치를 역설해 주셨으면 합니다. 너무 초현실주의적 넋두리일까요?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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